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1년 휴학을 했다. 딱히 계획은 없었다.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마음도 없었고, 그저 일상의 쳇바퀴에 무언가 왈칵 쑤셔 넣어 급제동을 걸고 싶었다. 그다음 일은 그다음이었고, 일단은 그저 멈추고 싶었다. 그렇게 트랙을 빠져나오니 방금 전까지 그 안에서 죽어라 달리던 내 삶이 초라해 보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이었다. 돌아볼 기회도 없이 달려온 지난 2년이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래, 떠나는 거야.’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지 않은 낯선 곳에서 마치 타인의 삶처럼 내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
이기적으로 영어도 잘하고 싶고, 이력서에 봉사활동을 했다는 한 줄도 남기고 싶고, 여행도 하고 싶어서 떠난 첫 발걸음이 무색하게 너무도 많은 걸 얻었다. ‘세상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통해 끊임없이 내 머리를 깨주는 넓은 세상을 만났고, ‘사람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외계인과 외국인을 동일시하던 내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까만 피부, 파란 눈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사랑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꿈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통해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며 울먹이던 내가 평생을 다해 이루고 싶은 꿈을 찾게 되었다. --- 프롤로그 ‘이력서가 아닌 내 영혼에 남은 흔적, 세계봉사여행’ 중에서
이번 주 작업은 숲에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Stile)’을 설치하는 것이란다. ‘스타일? 옷 스타일? 무슨 스타일을 낸다는 거야? 여기에 뭘 꾸며야 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갸우뚱해하니 눈치 빠른 토미가 설명을 해준다. 스타일은 울타리나 담의 일종으로, 사람만 넘어 다닐 수 있고 가축은 다니지 못하게 하는 계단이나 사다리 같은 것을 말하는 거란다. (…)
우리 팀은 나와 토미, 이탈리아 출신의 천연 파마머리 루카, 이렇게 셋. 먼저 스타일을 설치할 곳을 정하고, 삽으로 흙을 파내고 또 파냈다. 어느 정도 높이가 맞으면 경사계로 수평이 맞는지 확인하고, 맞을 때까지 흙을 파내기도 하고 다시 쌓기도 했다. 한나절을 흙과 싸우고 나니 땅이 고르게 된 것 같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스타일을 만들어볼까? 우선 톱질을 해야 했다.
“보미가 한번 해봐.”
“응? 내가? 해본 적 없는데….”
“안 될 거 뭐 있어? 해보면 좋을걸(Why not? Could be good)!”
“그래, 까짓 것 한번 해보지 뭐.”
내가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기보다 힘이 세지도 않은 걸 알면서도 토미는 나에게 기회를 줬다. 장난꾸러기 디키의 유행어, “안 될 거 뭐 있어? 해보면 좋을걸!”을 외치면서. 도대체 뭘 믿고 나에게 일을 맡겨주는 걸까?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서두르니, 천천히 하라며 나를 응원해준다. 도대체 저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톱질을 마치고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잘했어.”라며 한국어로 칭찬을 해주는 게 아닌가. 썩 잘한 것도 아니었는데 쑥스럽게… 나도 모르게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1장 ‘다분히 이기적인 봉사여행을 떠나다’ 중에서
우선 전지를 한쪽 벽면에 붙이고 대여섯 명 되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작했다. 건강 지압마사지 교육이었다. 인도 아이들이 영어를 못 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준비했기에 서로 언어가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그리고, 부위별 마사지의 효과를 동작으로 설명하며‘원, 투, 쓰리, 포’ 네 박자에 맞춰 할 수 있도록 간단한 안무를 짰다. 아이들이 춤추듯 신이 나서 따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엉성하고 어수선했지만, 첫 교육치곤 반응도 좋았다. 친구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어느새 아이들도 많이 늘어나 끝날 때쯤엔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
“준비해온 보건교육을 하면서도 이게 과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제 나름의 의미를 찾은 것 같아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손 씻기나 양치질 교육은 정말 기본적이면서도 꼭 필요한 건 아닐까, 양치질만 잘해도 치과에 가기 힘든 아이들이 치통으로 고생할 일이 줄어들 것이고, 손 씻기만 잘해도 세균에 감염되는 확률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전혀 쓸모없는 일이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우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더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알려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에요.”---2장 ‘우리는 다른 사람과 결합되었을 때, 보다 나은 사람이 된다’ 중에서
붙은 회사에 만족하고 일을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입사한다면 10년 뒤의 나는? 행복할까? 후회하지는 않을까?’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불안하고 고독한 시간들,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던 순간들이 계속됐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선배의 진심어린 응원을 떠올렸다.
“보미야. ‘꿈은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한한 노력을 담는 그릇’이래. 네가 워크캠프에 참가하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여행하고 했던 게 다 네 긍정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꿈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얘기했던 거 기억나? 지금도 똑같아. 여기가 저 로맨틱한 이탈리아나 프랑스, 매력적인 인도가 아니라는 것 말고는. 넌 지금도 여행 중인거야. 네 꿈으로 떠나는 여행 말이야.”
그랬다. 내가 여행을 떠나며 배웠던 건 ‘뭐든 시도해봐야 후회가 없다는 것’과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일들이 있다’는 거였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내가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꿈으로의 여행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무릎 꿇으려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3장 ‘꿈은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무한한 노력을 담는 그릇이다’ 중에서
“안녕? 반가워. 나는 미국에서 온 사라라고 해. 여기 모로코 아틀라스 산맥에 사업차, 봉사활동차 왔어. 지금까진 잘 지내고 있어. 음식도 잘 맞고, 하는 일도 너무 재밌고! 미국에서와는 너무 다른 삶이지만 행복해.”
현지 사람들과 능숙하게 말하고, 자신의 집인 듯 호텔에 편안하게 앉아 있던 젊은 그녀가 신기했다.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하기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녀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
“응,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충. 너처럼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곳에 와서 지식을 공유하고, 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직접 도와주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기업과 NGO가 만나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행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글로벌 기업에 가서 실력을 쌓고 힘을 키우면 그러한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나가고 실천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머릿속엔 아이디어가 많은데, 진짜 실행하려면 아직 많이 노력해야겠지. 사회에 나가 부딪치면서 발전시켜 나가려고!”
“보미, 너 나랑 왠지 통하는데? 모로코에서 내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될 줄이야! 우리 정말 괜찮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는데?”
사라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런 목표를 세웠으며, 어떻게 그 목표를 이뤄나갈 건지. 꿈을 공유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콩닥콩닥 뛰는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는 사실. 이 세상에서 나와 사람들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조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 함께 대화하며 그 꿈에 대한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을 부풀게 했다.
---3장 ‘꿈은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무한한 노력을 담는 그릇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