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은 마가복음에 있는 본문을 읽으며 처음에는 매우 당황한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너무 많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11절, 누가는 13절을 할애하여 시험 내용과 결과를 상세하게 기록하는데, 마가는 겨우 두 절에 걸쳐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언급한다. 이는 마가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며 출생 배경이나 준비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본문을 읽는 독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항을 잠시 접어 두고, 본문에 담긴 저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다른 복음서에 있는 자료를 무분별하게 끌어다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보충하여 하나의 스토리로 만든다면, 이해하기는 쉽겠지만 정작 중요한 저자의 의도는 놓친다.
--- p. 70
마가복음에 기록된 짧은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에는 세부 사항이 없다. 게다가 마태복음과 다르게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지속적으로 시험을 받았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으며, 천사들이 계속해서 시중들었다.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두 진영이 대결을 벌인다. 예수님을 후원하는 측에는 성령과 천사가 있고, 반대편에는 사탄과 들짐승이 있다. 마가의 내러티브는 독자들에게 결정적인 승리의 장면을 보여 주지 않고 극적인 대치 상황만을 제시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마가는 예수님의 시험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벌이는 거대한 세력 투쟁의 현장을 보여 준다.
--- pp. 81-82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데, 이 호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예수님의 신성을 암시하며, ‘다윗의 자손’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유대인의 메시아를 의미한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을 선호하는데, 이는 그가 1장 1절에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선언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고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치료하시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할 때 주로 이 칭호를 사용한다. 이 칭호를 보면 그녀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소문을 듣고 이 사실을 인정하며, 이것에 근거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에 총 10번 나오는데, 치료와 관련된 사례가 딱 두 번 있다.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 소리를 질러 고침을 받은 두 시각 장애인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9:27; 20:31). 이들은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다윗의 자손이라 부름으로써 즉시 고침을 받았다. 가나안 여인이 주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도 아마 이 호칭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방인이 이 호칭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 p. 142
수로보니게 여인의 필사적인 반론을 보며 감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신앙 때문에 핍박을 당하던 최초의 독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인내와 믿음이 결국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패턴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던지거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 주님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시든지 아니면 도리어 반문하신다. 그 결과로 질문을 던진 장본인은 당황하며 떠나가거나, 아니면 이해하지 못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비유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분을 적극적으로 논쟁에 끌어들이며 끈질기게 씨름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실마리를 얻고 상황을 재조정하여 도리어 주님을 놀라게 한다.
--- p. 186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제시하지 않으시며, ‘일반 은총’ 차원에서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신다. 즉, 율법에 기록된 대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신다. 그렇다면 그가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율법교사에게, 어디 한번 행위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보라고 도전장을 내미신다. 만약 율법교사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오, 주님,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외쳤다면, 주님은 분명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고 초청하셨을 것이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것은 누가복음 10장 21-22절과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11장 25-27절 다음에 이 말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들어간 그 자리에 마태복음의 이 말씀, 즉 예수님의 초청이 이어진다.
--- pp. 232-233
누가는 두 개의 에피소드,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4중으로 단단히 엮고 있다. 첫째, 기도, 성령,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라는, 단어와 상황 설정을 통해 두 개의 에피소드를 앞뒤에서 감싼다. 둘째, 지혜로운 자와 어린아이,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대조하고, 율법교사와 마리아를 등장시켜 각각의 사례로 활용하여 이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다. 셋째, ‘간청함’이란 단어를 삽입하여 대담함과 뻔뻔함을 보여 주는 두 에피소드를 하나로 결합시킨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과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편’에서, ‘좋은’이란 단어를 일치시킨다. 이는 사마리아인과 마리아가 보여 준 충격적인 선한 행위가 궁극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점을 확실히 한다.
--- p. 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