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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쓰다

역사를 쓰다

: 이이화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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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7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523쪽 | 733g | 152*214*35mm
ISBN13 9788984314825
ISBN10 898431482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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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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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이화
1936년 대구 비산동에서 태어나, 부친인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 선생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열여섯 살 무렵 집을 나와 부산·여수·광주 등을 떠돌다 여관 종업원 노릇을 하며 광주고를 졸업했다.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해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하고, 아이스케키·빈대약장수·술집웨이터·가정교사 등 20여 가지 직업을 거쳤다. 이십대 후반 무렵 본격적으로 역사학을 공부하겠다 결심하고, 동아일보사 출판부와 색인실 임시직을 거쳐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 서울대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고전과 역사를 연구했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때 참여한 뒤 연구소장이자 《역사비평》 편집인으로서 동학농민전쟁 등 민중·생활사 연구와 역사답사기행 등을 주도하며 역사 대중화에 나섰다. 이렇듯 독학으로 ‘역사학자’의 길을 개척하면서 ‘민중사·문화사?생활사’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일궈냈다. 특히 1995년부터 10년 동안 칩거하며 써낸 한국통사인 『한국사 이야기』(22권)는 필생의 역작으로 꼽힌다.
역사학자로서 저술뿐만 아니라 ‘역사바로잡기운동’이나 ‘과거사 청산’ 등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로잡는 역사운동가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았고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단체 조사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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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나의 얘기를 쓸 적에는 진솔하면서 과장 없이 담아내고 싶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그대로를 ‘리얼’하게 드러내려고 했다는 뜻이다. 내가 평소에 역사인물이 될 만한 인사의 자서전이나 저명인사들이 쓴 살아온 얘기를 읽으면서 자기가 한 일은 모두 정당한 것처럼 서술하거나, 아니면 어떤 사건을 두고는 자기 중심의 서술로 일관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거의 가식과 과장과 허위로 포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 내가 살아온 시대가 너무나 험악했고 격동의 세월이어서 현장을 통해 내 삶과 사회를 연결하는 사회사적 접근을 시도해보려고도 했다. 내가 겪은 대로 사회의 밑바닥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또 제 혼자만 잘살아보겠다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얘기만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이나 더불어 나누는 훈훈한 정담도 고루 담아보려고 생각했다. 미시적 접근을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얘기를 쓰면서 이게 쉽게 되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을 자기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냉철한 이성이나 지나친 객관성은 오히려 한 개인의 개성을 흐리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증언자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역량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늙은 나이에 새삼 떠올린 것은 남의 자서전을 읽고 비평하는 것과 내 자신이 쓰고서 내부 검열을 하는 데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pp.4~8

나는 8개월 만에 태어났다. 이를테면 팔삭둥이다. 태아 때부터 영양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게다가 미숙아로 세상 빛을 보았으니 정상적인 영아가 아니었다. 가슴과 팔다리는 배배 꼬여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태생만이 비정상이 아니라 왼손잡이에다 성장해서도 키는 160센티미터 채 못 되는데다 학교도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생각도 삐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태어날 때 나를 받았다는 둘째 형수는 그때 얘기만 나오면 “작고 삐삐 말랐어요”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아이를 보러 와서는 “그놈 눈 하나는 똘망똘망하네”라고들 했단다. 흔히 하는 귀엽다든지 잘생겼다든지 같은 덕담 대신에 눈만은 총명하다고 말한 것이다. --- p.24

이때 나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고루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자. 나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학교를 다니자. 새로운 세상에 나가보자. 바로 이것이었다. ‘도통’을 했다고 소문난 야산 선생, 내 아버지도 아들의 이런 결심은 몰랐을 것이다. ……
나의 가출 동기는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나를 전혀 서자로 여기지 않고 아들 중의 하나로 여겼다. 그렇지만 내 어머니에게는 달랐다. 형님들은 작은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서모’라 불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굳이 그런 호칭을 써야 하는지 불만스러웠다.
또 언제부턴가 내가 거리에 나가거나 남의 집에 가면 “쟤가 머리는 아주 좋은데 서자래”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가정이나 사회에서 서자 차별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이런 내 태생에 대한 불만이 가슴속에 저몄다. 나는 그렇게 끝내 가출을 결행했다. --- pp.57~59

그 뒤 몇 해 동안 나는 출판부에 임시직원으로 나가 『동아연감』 출간 작업을 하고 봄여름의 공백 기간에는 을지로 입구에 있던 국립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한국학 또는 한국사 관련 책과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동아일보사 조사부와 국립도서관의 책들은 나의 한국사 공부에 밑거름이 되었다. …… 나는 색인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자 지식이 많은 덕분에 오자가 적었고 이해도 빠른 편이었다. 특히 《동아일보》 창간 직후인 1920년대의 갖가지 식민지 분위기와 사회 사정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1920년 초기 조선의 북방이나 만주 지역 기사에 ‘비적 출현해 경찰과 교전’이라는 기사가 나오면 항일 독립투쟁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총독부의 식민지정책만이 아니라 여러 사건 사고 기사를 통해 식민시대 사회 분위기와 근대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어느 대학의 사학과에서 이런 알찬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6년 남짓 되는 동아일보사 생활을 다시 더듬어보면, 기한부 임시직에서 계약직인 촉탁에 이르기까지, 내내 주류에 끼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를 전전한 처지였다. 또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도 술 마시고 떠들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득이 많았다. 요즈음도 나는 이 시절을 두고 "번듯한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말한다. --- pp.123~124

1975년 한국사연구회에서 주제발표를 하면서부터 얼치기 연구자였던 나는 한국사학계의 중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 나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 뒤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이로 해서 국외자의 위치에서 역사학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신문이나 월간 잡지에 한국사 관련 글을 쓰며 집필가로 이름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두어 가지 다짐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사 관련 글만 쓰기로 결심했다.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려는 뜻이었다. 또 역사 대중화를 위해서 논문만이 아니라 일반인 대상의 한국사 관련 교양서를 써보기로 했다. 당시 이른바 순수학문을 한다고 표방한 인사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을 ‘잡문’이라 해서 쓰지 않는 것을 품위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교수’ 같은 전문 직업을 갖지 않은 ‘프리랜서’로서 원고료나 인세로 살아가야만 했으니 대중을 위한 글을 쓰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었다. --- pp.139~140

이들 저술에는 발굴의 성격이 강한 주제와 내용이 많았다. 이미 알려진 역사 사건이라도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특히 지리산이나 구월산 일대에서 활동한 변혁세력의 활동을 새롭게 조명했다. 또 인물사에서는 흔히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을 재평가했는데, 광해군·강홍립·정여립·정인홍 등 임금이나 벼슬아치들, 홍길동·임꺽정·장길산 등 의적 또는 이필제·전봉준 등 동학세력들, 신돌석·장지필 등 평민 의병장이나 백정 인권운동을 벌인 기층민중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로 다루어져 왔었다. --- p.185

1986년은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의 탄생이었고 또 하나는 내 딸 응소가 ‘쉰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역문연이 나의 학문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뿐더러 나를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로 만들어주었다면, 늦둥이 딸은 가정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해 1월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서 1박2일로 첫 준비모임을 했다. 이때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우리는 두 가지 합의를 보았다. 첫째는, 정치가나 민주화 운동가보다는 역사학 전공자들을 조직의 선두에 두자는 것, 둘째는, 연구소 형식을 빌려서 한국사를 중심에 두고 인접 분야인 각 인문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조직을 만들되 이름은 ‘역사문제연구소’로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역문연의 설립 목적은 한마디로 표현해 한국 근현대의 여러 문제를 공동작업을 통해 연구하고 이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 바로 그것이었다. --- pp.191~192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봉오동전투 현장, 하지만 전투가 벌어졌던 골짜기는 당시 저수지로 바뀌어 ‘봉오동 반일유적지’라는 팻말만 서 있었다. 1920년대 초 홍범도 부대는 국경지대에서 무장활동으로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에 남양 주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추격에 나섰다. 그해 6월 6일, 독립군 연합부대로 편성해 700여 명 규모를 갖추었던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골짜기로 유인해 사면 총공격으로 전사 150명, 총상 200여 명에, 소총 160정, 기관총 3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립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항일독립전쟁 과정에서 최초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 봉오동전투를 두고 연변의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정작 홍범도 부대가 전투의 중심부에 있었고 김좌진 부대는 2선에서 도왔다고들 했다. 연변 일대에서는 홍범도를 봉오동전투의 영웅으로 받들고 김좌진은 보조역할을 한 것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남쪽의 교과서 등에서 청산리전투만 부각시킨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이 전투의 중간지휘관이었던 철기 이범석(훗날 국무총리)이 김좌진과 자신이 모든 걸 지휘했다고 주장하며 홍범도를 완전히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엉터리 역사 기록을 현장 답사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한 나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pp.255~258

백추위에서는 우선 ‘동학’ 관련 역사 용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많이 쓰는 용어로는 동학란을 비롯해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또는 혁명·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했다. 동학란은 왕조 시대의 용어로, 민란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를테면 ‘역적질’을 했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천도교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동학이 주도해서 혁명을 추구했다는 의미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동학농민전쟁은 농민이 주체세력이었지만 동학이란 조직 또는 평등사상을 포용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과 농민이 결합해서 혁명을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썼고 남쪽의 진보학계에서도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곧 그 운동 주체는 생산대중인 농민이란 것,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존재를 배제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답습한 것이다. 먼저 이런 여러 용어를 두고, 역사학자·정치학자·사회학자 들을 모아 1990년 6월 토론회를 열었다.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니 결론이 날 턱이 없었다. 다양퇇 학문 경향을 추구하는 풍토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아도 탈 잡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원인 소장학자들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바꾸어 썼다. 나는 동학은 외피보다 인간존중사상과 봉기과정에서 나타난 조직 동원 등의 사실을 들어 일단 ‘동학농민전쟁’으로 쓰기로 했고, 이 용어를 백추위에 반영했다. --- pp.290~291

조선 중기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므로 각기 ‘조-일 전쟁’과 ‘조-청 전쟁’으로 불러야 국제교류사의 관점에서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의 경우,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간지의 연대를 쓰고 일본 민족을 얕잡아보는 ‘왜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을 담은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의 호란이란 용어의 경우도 ‘북방 오랑캐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교과서에 이런 용어를 쓰게 되면 설명이 길어지고 민족 차별관을 유발하게 된다. 다만 주체와 전쟁이란 용어를 써서 그 실상을 알리면 된다는 뜻이다. 그사이에 대두한 척화파와 주화파의 현실 대응을 두고 타협적인 주화파의 정당성을 부각하려 했다. 주자학으로 무장한 척화파는 중화주의에 매몰되어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실체가 없는 명분론에 따른 ‘존명배청’으로 일관해서 국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했다.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를 벗어나 다른 민족을 인정하면서 교류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송시열 계통의 노론 세력이 주화파를 마치 매국노처럼 다루는 행태를 경계하려 한 것이다.
조선 후기는 역동적 사회를 이루어냈다고 보았다. 물이 고여서 썩은 게 아니라 줄기차게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실사구시에 바탕을 둔 실학의 추구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논리였으며, 노비 등 민중의 저항과 중인-서민문화의 대두는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내재적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 이런 관점에서 민중사·생활사 기술에 열중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개된 통과의례와 놀이문화와 고유의 풍속과 독자적인 문화 창달을 부각하려 했다. 그래서 서민문학의 유행과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그리고 판소리와 가면극의 등장이 민중에 토대를 두고 유교의 엄숙주의 또는 지배문화의 근엄성을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실학과는 달리 중세와 근대의 중간 지대에서 태생한 민중정서 분출의 한 모습이었다. --- pp.372~373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 갈등과 과거사 청산의 중심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문제가 놓여 있다. 그 피해자들은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숨죽이며 살아왔으며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또 군이나 경찰에 들어가 출세할 수도 없었으며 외국 유학이나 여행을 갈 적에도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극한의 인권유린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두 가지 전제, 곧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유족들에게 적용되는 연좌법의 철폐가 이뤄져야 했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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