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판소리 여섯 마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줄거리 정도는 알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 있는 대사들의 맛은 알고 있는가?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동양의 고전, 설화들이 들어 있고 그 속에 어떤 비유와 해학이 있는지 아는가?
실제로 대본을 읽어보노라면 그 비유와 예화가 고금을 넘나들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문학의 최고봉의 하나인 판소리 사설을 왜 국어시간에 한 대목도 읽어주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항의해야 한다(이것이야말로 교과과정의 문제다. 학교에서 몇 학년 몇째 시간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결정해 놓은 것, 그것이 교과과정이라고 정의된다면, 교과과정이 관건이다). 그 사설을 알아야 판소리가 비로소 귀에 들어온다. 음악 부분에서 본다면 그 속에는 고려시대의 가요형식에서부터 조선시대의 민요, 시조창, 단가형식을 복합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리듬에서는 우리 민족이 발견한 하나의 완전한 조곡 형태인 산조(진양조에서 시작해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점점 빨라지는 민속음악의 형태)와, 2박, 3박, 7박 등의 각종 박자를 능숙하게 섞어 쓰는 변박자가 녹아 있다. 사설이 담고 있는 문학과 음률이 갖고 있는 음악, 몸짓과 추임새 등의 연극이 결합된 종합예술인 이 판소리야말로 우리 민족이 키워낸 숙성된 문화의 전형적인 형태임에 틀림이 없다.
문화는 재배, 또는 숙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씨를 뿌려야 하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씨도 뿌리지 않을뿐더러 기껏 힘겹게 자라려고 하는 우리 문화에다가 거름을 주지는 못할망정 서양의 풀만을 키워주고 있다. 그 속에서 서양의 좋은 풀만이 아니라 잡초도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 속에서 온갖 서양의 잡초가 마구 자라다 보니 우리 문화라는 싹은 햇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 문화 부재의 한심한 현상이 음악에 유독 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미술을 보자. 개화기에 서양의 미술이 들어왔지만 미술인들은 비록 전통적인 동양화의 물감과 붓, 종이를 쓰든, 서양의 유화도구, 이젤이나 나이프, 캔버스를 쓰든, 우리의 산하를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외국의 미술사조가 들어오지 않는 게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미술인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우리 미술은 적어도 음악에 비해서는 정상적인 궤도를 달리고 있다. 한때 미술에서도 서양 것, 우리 것의 이분법적인 논쟁이 한창일 때 어느 서양인은 유화로 그린 우리나라 미술인의 작품을 보고 “네, 이것은 한국화군요”라고 말을 해서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말뜻은 재료가 무엇이든 간에, 한국인의 마음과 예술성과 심미안, 가치관이 들어가 있으면 그것은 한국화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사람이 그린 유화와 한국사람이 그린 유화를 비교해 보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양식 물감으로 그렸지만 박수근의 작품을 누가 외국 것이라고 할 것인가? 이중섭의 〈소〉는 스페인의 투우에 나오는 소와는 확실히 다른 한국의 황소다. 미술에서 재료의 문제는 이미 논쟁에서 제외된 듯한 느낌이다. 인사동에 나가 보면 우리는 다양한 미술인들의 활동을 많이 보게 되고, 그들의 작품 속에서 한국인들의 미술적인 재능을 엿보게 된다.
미술뿐이랴? 문학을 보자. 아직까지 노벨상을 탄 작가가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 작가들의 작품세계가 외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외국에 다수 번역, 소개돼 절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오천 년이라는 역사 속에 가꿔진 우리들의 심성, 경험, 가치관, 민족상잔의 고통과 그 후유증, 급격한 경제발전에 따른 인간소외의 문제 등등… 우리 민족의 내면이 녹아내려져 있는 문학작품들, 그 작품들은 이제 언어의 분해와 분석에 지쳐 스스로 언어에 피곤해진 서양에서 새로운 돌파구의 하나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심성과 생각을 우리말로 표현해 내었기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이 봐도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 p.67
황종음을 찾는 것은 단순히 음의 높이를 찾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기본음을 내는 율관(대나무 관악기 튜브)의 길이가 일상생활에서 길이를 재는 자〔尺〕의 기준이 되고, 그 대나무관의 빈 공간에 가득히 채워지는 기장의 양은 부피를 재는 양(量)의 척도가 되며, 그 기장의 무게는 곧 모든 물건을 다는 무게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황종’이라는 기본음을 만들어내는 죽관(竹管)은 소리를 내는 기능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좌지우지하는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황종음을 내는 기본율관의 길이를 얼마로 정하느냐의 문제는 단지 음악적 차원에서만이 욾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의 차원에서도 더없이 막중한 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처럼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세종은 심혈을 기울여 이를 정리했다.
‘아악’에 사용되는 여덟 가지의 악기 중에는 쇠로 만드는 편종(編鐘)과 돌로 만드는 편경(編磬) 같은 악기가 있는데, 특히 편경을 만드는 재료인 돌은 보통의 것은 안 되고 특수한 돌이어야 하기 때문에 편경악기는 만들고 싶어도 마음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세종대왕 때 서울 근교의 한 지방에서 편경을 만드는 돌이 발견되어 결국 세종이 편경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당시의 기록들은 세종 같은 훌륭한 왕이 음악을 정비하고 발전시키려고 뜻을 세우니 하늘도 감복하여 기꺼이 도와준 결과라고 적고 있다.
편경은 돌을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깎고 단지 두께만을 달리해서 여러 가지 높이의 음들을 내게 하는 타악기(percussion Instrument)다. 한 번은 신하가 이 편경 한 틀(set)을 만들어 세종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세종은 그중의 어느 음이 높이가 아주 조금 높다고 지적했다. 신하가 그 음을 내는 돌을 자세히 살피니 석공이 돌을 덜 깎아내어 돌에 깎아내도록 지정해 준 먹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먹줄을 다시 깎아낸 후에 연주를 하니 음높이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세종의 음악적인 귀가 그만큼 밝았음을 짐작케 하는 일화다. --- p.127
옥중에 있으면서 겪은 쓰라린 체험은 그를 〈장자〉 ‘제물론’편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에 나오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도록 했다. 수감중이던 1967년 10월, 옥중에서도 작곡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오페라 〈나비부인〉을 1968년 12월에 완성한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성과였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69년 하랄드 쿤츠, 조르지 리케티, 한스 베르너 헨체,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지그프리드 팔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오토 클렘페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161명에 달하는 세계적 예술가 및 그의 동료 그리고 독일정부의 항의로 윤이상은 석방되고, 2월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가게 된다. 2월 23일에는 그의 2부작 오페라 〈류퉁의 꿈(1965)〉, 〈나비부인(1967/68)〉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된다. 그 음악이 초연될 때의 반향은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4년 후인 1972년 뮌헨 올림픽이 열린다. 윤이상은 오페라 곡을 위촉받아 오페라 〈심청〉을 작곡했고, 무대에서 초연된 후 다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비로소 우리의 전래설화가 음악을 통해 세계로 부상한 것이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동양이자 한국이다. 그렇기에 그가 성공했을 것이다. 어설픈 독일의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우리 이야기를 음악으로 형상화했으며, 그것은 전후 갈 길을 잃고 고민하던 서양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다. 〈나모〉, 〈요정의 사랑〉, 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 〈무악〉,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공후〉 등 우리가 다 아는 소재를 음악으로 올려놓았다. 그가 한국에서 자라며 듣고 배운 모든 것이 다 그의 음악의 자산이 되고 원료가 되고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미신이라고 치부되던 무당굿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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