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녀가 대문 쪽으로 달려 나왔네. 그러고는 로테 아가씨가 곧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더군.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멋지게 지어진 건물 쪽으로 걸어갔네. 계단을 올라가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매혹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오지 뭔가!
아름다운 아가씨가 두 살에서 열한 살 사이로 보이는 여섯 명의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그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아가씨였어. 그녀는 팔과 가슴에 분홍색 리본이 달린 수수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
얼굴 가득 다정한 미소를 띤 그녀는 검은 빵을 손에 들고서 빙 둘러선 꼬마들에게 나이와 식욕에 따라 알맞게 빵을 떼어 주었네.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들을 높이 쳐들고 기다리다가 빵을 받으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하고 외쳤지. ---p.36 중에서
빌헬름, 사랑이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불빛이 없는 환등기라 할 수 있을까? 그 안에 불을 넣어야 비로소 화려한 모습들이 하얀색 벽에 비치게 되지! 그것이 일시적인 환영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풋내기 소년처럼 그 앞에 서서 놀라운 그림들에 매혹된다면 그것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아니겠나?
오늘은 로테에게 가지 못했어.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 있었거든. 그래서 어쩌겠는가? 나는 하인을 로테의 집에 보냈네. 하인을 통해서라도 그녀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말일세. 얼마나 전전긍긍하면서 그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까 돌아왔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체면만 아니었다면, 그를 껴안고 키스라도 퍼부었을 걸세.
형광석이라는 걸 들어 본 적 있나? 햇빛 아래 놓아두면 햇빛을 흡수하여 밤에도 한동안 빛을 낸다지. 내게는 그 하인이 바로 그런 형광석이었네. 로테의 눈길이 그의 얼굴과 뺨, 윗도리의 단추와 외투의 깃에 머물렀으리라는 생각만 해도 모든 것이 무척이나 거룩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다네! ---p.75~76 중에서
하느님이 그대들을 축복하시고, 내게 베풀어 주시지 않았던 좋은 날들을 그대들에게는 꼭 허락하시기를!
알베르트, 나를 감쪽같이 속이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그대들의 결혼식 날이 언제가 될지 늘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그날에 맞춰 내가 그린 로테의 실루엣 그림을 벽에서 떼어 버릴 작정이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대들은 이미 부부가 되었고, 로테의 그림은 아직 이 벽에 걸려 있군요! 이제 그냥 걸어 두기로 하겠습니다.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나 역시 그대들 곁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나는 로테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로테의 가슴속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싶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오, 만약 로테가 날 잊는다면 나는 미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알베르트, 이런 생각 속에 바로 지옥이 도사리고 있어요. 알베르트, 잘 있어요! 잘 있어요, 하늘의 천사! 로테, 안녕히! ---p.132~133 중에서
로테, 당신을 위해 죽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나를 내어 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의 안식과 기쁨을 위해서라면 용감히, 기꺼이 죽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아, 당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고 죽음으로 친구들에게 백 배의 새로운 인생을 선사하는 것은 오로지 숭고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던 일입니다.
로테, 나는 이 옷을 입고 묻히렵니다. 이 옷은 당신이 만지고 손을 대었기에 거룩해졌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나의 영혼은 벌써 관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누구도 내 호주머니를 뒤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내가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당신이 달고 있던 이 분홍색 리본을 가져갑니다.
아, 아이들에게 키스를 해 주세요. 그리고 이 불행한 친구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나를 보면 우르르 모여들곤 했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 아아, 나는 얼마나 당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지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일 선물로 주었던 이 리본을 나와 함께 묻어 주세요. 내가 이런 것들을 얼마나 탐내었는지! 아, 그 길이 나를 이리로 인도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진정해요, 제발 부탁이니, 마음을 가라앉혀요!
탄환을 재어 놓았습니다. 시계가 열두 시를 치고 있군요! 자, 그럼 이만! 로테, 안녕! 안녕!
---p.24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