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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2막 1장 2장 3막 4막 해설 - 피와 눈물로 쓴 슬픈 생애의 여로 유진 오닐 연보 |
저유진 오닐
관심작가 알림신청Eugene Gladstone O'Ne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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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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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전 안개가 좋아요. 안개 속을 걷고 싶었어요. (표정과 목소리에서 좀 더 취기가 도는 기색이 엿보인다.)
타이론: 좀 더 분별 있게 행동해야지. 괜히 위험하게……. 에드먼드: 분별 따위는 엿 먹으라 그러세요! 다들 미쳐 돌아가는 판에 분별 있어서 뭐하게요? (조소 어린 투로 다우슨의 시를 낭송한다.) “울음과 웃음, 사랑과 욕망과 미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가 그 문을 지나고 나면 그것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리니. 술과 장미의 나날들은 오래가지 않으리. 우리의 길은 아스라한 꿈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꿈속에서 끝나리니.” (무대 전면을 응시하며)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 길을 반쯤만 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아요. 이 집이 여기 있다는 것도 알 수 없게 되죠. 마을 길가에 있는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예요. 바로 코앞의 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가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모든 게 다 비현실적인 것들처럼 보이고 들렸어요. 실체는 하나도 없었죠. 제가 원했던 게 바로 그거였어요. 진실이 진실이 아니고 삶이 저 자신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 속에 홀로 있는 것. 항구 저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난 곳에 이르렀을 때는 땅바닥을 밟고 있다는 느낌조차도 사라졌어요. 안개와 바다는 한 몸인 것 같았죠. 그건 마치 심해 밑바닥을 걷는 것과 흡사한 기분이었어요. 마치 오래전에 익사한 것 같은 느낌. 저는 안개에 속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 같은……. 유령 속의 유령이 되니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편안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걱정을 하면서도 마뜩잖은 눈길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조롱하듯 히죽이 웃으며)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온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우리네 삶은 고르곤 셋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이나 같아요.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해버린다는 그 괴물들 말이에요. 아니면 판 신 같죠. 판을 보면 우린 죽어요, 우리 안의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해서 우리는 유령으로 살아가게 되죠. 타이론: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마뜩잖아 하면서) 너는 시인 기질이 다분하긴 하지만 병적인 냄새가 너무 짙어! (억지로 미소 지으며) 고약한 염세주의지.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저조하구먼. (한숨을 쉰다.) 그런 삼류 시들은 집어치우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나 외우렴. 그 대사들 속에서는 네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근사한 잠언들은 거기 다 있어. (낭랑한 목소리를 구사해서 낭송한다.) “우리는 꿈같은 존재요, 우리네 짧은 생애는 잠으로 마무리되리니.” 에드먼드: (빈정대며) 근사해요! 아름다워요. 하지만 제가 말하려고 했던 건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똥 같은 존재들이니 실컷 퍼마시고 다 잊어버리자. 이게 제 생각에 더 가깝죠. ---본문 중에서 |
제임스 타이론은 전도유망한 연극배우였으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지독한 수전노가 되어, 지금은 땅을 사는 것 이외에는 가족들의 치료와 요양에도 돈을 아끼는 타이론가의 가장이다. 그의 아내 메리는 꿈 많은 수녀원 학교 여학생이었으나, 싸구려 의사의 잘못된 처방 때문에 모르핀 중독에 빠지고 만다. 1912년 어느 여름날, 증세가 어느 정도 호전된 메리가 요양원에서 타이론가의 여름별장으로 돌아오지만, 주위 환경이 불안하고 견디기 힘들어 다시 모르핀을 주사하기 시작한다. 막내아들 에드먼드는 오랜 방랑 끝에 신문사 기자가 되어 정착 생활을 시작하려 하지만, 이내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병적일 만큼 극심한 인색함을 보이고, 어머니는 모르핀 기운에 취해 자기만의 환상 속에 갇혀 있다. 장남인 제이미는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지내다가, 아버지가 연극을 쉬는 여름철에 아버지에게 의탁하곤 하는데 이번 여름에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어머니가 모르핀 중독에서 벗어나고 동생이 성공가도를 달린다면 그 기회에 자신도 삶을 쇄신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어머니와 동생의 불행을 보고 또다시 좌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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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슬픔을 피와 눈물로 써내려간 유진 오닐의 자전적 희곡
그리스비극 주인공과도 같은 타이론가 사람들 운명의 사슬에 묶여 안개 속에 갇히다 노벨 문학상, 네 번의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진 오닐 최고의 작품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열 번째 작품으로 유진 오닐의 대표작 《밤으로의 긴 여로》가 출간되었다. 오닐이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해묵은 슬픔을 피와 눈물로 썼다”고 밝힌 바 있는 자전적 희곡이다. 4막의 극 안에는, 한 편의 장엄한 비극과도 같은 작가 자신의 고통스런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오닐은 유언을 통해 자신의 사후 25년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이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지 말 것이며, 공연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사후 3년 만인 1956년, 이 작품은 오닐이 존경하던 스트린드베리의 조국 스웨덴의, 스톡홀름 왕립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오닐은 사후에 네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된다. 미국 현대극은 유진 오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오닐은 이렇다 할 연극 풍토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미국의 연극계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인 형태의 사실주의극을 태동시킨 작가다. 오닐 이전의 미국 연극은 제대로 된 극작술이나 예술성 등을 추구하기보다,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재미만을 좇는 멜로드라마나 권선징악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신파조의 연극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불우한 개인사를 예술혼으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해낸 오닐은 이후 테네시 윌리엄스(대표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아서 밀러(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 에드워드 올비(대표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샘 셰퍼드(대표작: 《매장된 아이》) 등에게 큰 영향을 주며 미국 현대극이 유럽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 문화로 자리 잡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 비참했던 가족사를 피와 눈물로 써내려간, 애증과 연민의 여로 이 작품은 오닐 일가족의 실제 삶의 축도나 다름없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으로 유랑 극단의 배우로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삼류 흥행배우로 전락한 아버지 제임스 오닐(극에서는 제임스 타이론), 남편을 따라 호텔을 떠돌며 생활하다 둘째(유진 타이론)를 홍역으로 잃고, 막내를 낳은 후 산후 고통에 시달리다 돌팔이 의사에게 모르핀을 맞고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어머니 엘라 퀸랜(메리 캐번 타이론), 난봉꾼 알코올 중독자로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인생의 실패자 형 제이미 오닐(제임스 타이론 2세=제이미), 그런 형을 좋아하고 따랐던 예민한 성격의 허무주의자 막내 유진 오닐(에드먼드 타이론). 오닐이 이처럼 이름만 살짝 바꿔 자신의 가족을 극에 그대로 등장시킨 것은, 본인이 평생토록 피해 다녔던 가족사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오닐은 헌사에서도 “[……] 마침내 죽은 가족들과 정면으로 마주설 수 있었고, 참담한 고통에 시달렸던 타이론 가족 네 사람 모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서 결국 이 희곡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숨기고 싶은 어두운 과거를 끄집어내 위대한 용서로 승화시킨 오닐의 용기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상연, 출간되며 많은 관객과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