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 『테라피』가 환영이 현실로 드러나는 기발한 착상을 줄거리로 딸에 대한 아버지의 병적인 사랑을 그렸다면, 이 소설은 딸과 어머니의 애증 관계에 대한 섬세한 성찰을 담고 있다. 자신이 대결해야 하는 성향, 가족들 사이의 복잡한 심리적 문제를 넘어 딸과 어머니가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해 보여주는 배려와 애정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한편 첫 소설과 비교한다면 이 소설은 서사적 요소가 더욱 풍부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긴박하게 전개되는 한편의 영화를 감상한 느낌이 든다. 작가는 플롯과 등장인물의 성격묘사에서 영화적 감각을 잘 보여 준다. 덕분에 이 작품은 이미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영화 판권까지 팔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이 가진 미덕은 심리 묘사가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심리 상태, 도저히 원인을 다 캐낼 수 없고 또 현미경으로 들이대어 분석할 수 없는 인간이 지닌 신비한 성향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주는 문학적인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무슨 일이 있어?”
“……그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믿으면 안 돼요.”
“뭐라고?”
“그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을 믿지 말란 말이에요. 알아들었어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당신은 다만……”
나머지 말은 다시 잡음 속에 묻혀 버렸다. 그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하면서 얼른 몸을 돌려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레오니? 당신이야?”
그는 수화기를 향해 그리고 동시에 막 노크 소리가 나고 있는 현관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통화 음질이 나빴던 것은 레오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느라 그런 것이며, 드디어 그녀가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레오니는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미안해, 자기야. 너무 늦게 왔지? 차가 막혔거든. 다시는 그 길로 오지 않을 거야. 기다 리다 죽을 뻔했어.”
‘그런데 오늘은 정말 이상하다. 그녀는 왜 울고 있지? 그리고 왜 현관문을 노크하고 있을까?’ ---「프롤로그」 중에서
1
이라는 아파트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섰다. 베를린의 낡은 건물 현관에서 늘 감도는 세제냄새, 길거리의 먼지 그리고 음식냄새가 코에 들어왔다. 쓰레기와 담배 연기 그리고 지하철역에 들어설 때 풍겨나는 기름냄새 등이 뒤섞인 묘한 냄새였다.
‘이런 냄새도 그리워지겠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이런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거야.’
죽는 것 자체가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정말 두려운 것은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죽은 딸의 환영은 심장의 박동이 멈춘 후에도 그녀를 따라올 것이므로 고통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죽은 사라의 모습’
이라는 아래층 현관에 있는 그녀의 우편함에 우편물이 넘쳐나는데도 이를 애써 무시하고는 몸을 움츠리면서 따스한 봄날의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나섰다. 도중에 지갑에서 마지막 남은 돈을 꺼내고는 지갑을 길가에 있는 컨테이너에 내던졌다. 신분증,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그리고 낡은 자동차의 차량등록증이 들어있는 지갑이었다. 몇 분만 지나면 모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chapter 1 캐시 콜 라운드」 중에서
5
얀은 모니터들과 믹싱 콘솔이 다시 작동하는 것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마이크를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집에서 가상의 장비를 상상하면서 여러 번 연습했던 대로 터치스크린 키패드에 있는 적색 신호스위치를 눌렀다.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팀버는 재차 물었다. 이 질문은 그대로 방송을 타고 나가 전 베를린 시민이 들을 수 있었다.
101.5 방송은 다시 정상적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얀은 권총으로 스타 진행자의 머리를 다시 겨냥하면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아주
차분하고 진지하게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안녕, 베를린. 지금 시각은 7시 35분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지금 엄청난 악몽을 듣고 계십니다.”---「chapter 1 캐시 콜 라운드」 중에서
6
“당신한테 이미 말했잖소. 레오니를 데려 오면 인질극을 중단하겠다고. 그녀를 당장 이리 데려오란 말이오. 이 스튜디오로 말이오.”
얀은 이렇게 대꾸하면서 24시간 뉴스 채널을 시청했다.
화면 아래쪽에는 시민들에게 전화를 받게 될 경우 어떤 구호를 외쳐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문이 나가고 있었다. 아울러 내무장관이 이번 사태에 대한 브리핑을 하는 기자회견을 갖겠다는 소식도 있었다.
“내가 레오니를 다시 품에 안게 되면, 이 모든 소동은 끝날 거요.”
이라가 다소 체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방금 내가 받은 서류에 의하면 당신 약혼녀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어요. 지난해 9월 19일, 17시 55분에.”
“물론 그렇겠지. 그 보고서는 나도 알아요. 내 눈으로 직접 봤고 사본 한 장은 집에도 보관되어 있소. 하지만 정말 형편없는 보고서요. 정말 말도 안 되는 보고서지.”
“어째서요?”
“레오니는 아직 살아있소.”---「chapter 2 지키고 싶은 거짓말」 중에서
23
“우리 인생에서 뭔가 소중한 의미를 가진 사람은 적어도 일부분은 언제나 비밀로 남죠.”
얀의 목소리는 상념에 잠긴 듯했고 내면으로 침잠된 듯했다. 마치 문제를 풀기 위해 혼잣말을 하는 학자 같았다.
“지금 얘기하는 걸 이해한다면 당신은 레오니를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아마 사라가 당신에게 내준 마지막 수수께끼도 풀릴 거요.”
이라는 얀이 쏟아놓는 말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도중에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을 아예 단
념했다.
얀이 계속 이야기를 했다.
“결혼의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상담치료를 하면서 언제나 같은 경험을 했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견고할수록, 그들의 사랑은 더욱 비밀스럽다는 거요. 결말을 뻔히 아는 얘기보다 우
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오. 그리고 커다란 의문부호만큼이나 관계를 돈독히 해
주는 건 없소. 내 파트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나에게 언제나 한결같을까? 나는 그와 모
든 감정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는 나에게 숨기는 감정이 있는 걸까? 만약 우리가 솔직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정말 알아가려고 하지 않겠죠. 위대한 사랑은 비밀스러움이 있어 우리를 결코 지겹게 하는 일이 없죠…….” ---「chapter 2 지키고 싶은 거짓말」 중에서
22
이라는 얀을 처음으로 직접 만나면서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이 남자가 오늘 인
질극을 벌인 사람이란 말인가? 얀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어쩐지 희생자의 인상을 주었다.
‘너무 부드러운 인상이야.’
이라가 그를 보면서 품은 첫 생각이었다. 이라는 자신의 딸을 죽일 뻔했던 살인자를 증
오하리라고 마음을 먹었으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키티가 싱크대 아래 숨
었던 그 부엌에 섰다. 이라가 그에게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에 앞서 물 한잔을
달라고 하자, 얀은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막았던 CD 진열장을 다시 치웠다.
그는 이라가 하는 말을 모두 믿는 것이 분명했다. 레오니가 그에게로 올 것이라는 말
을. 그리고 벌써 베를린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chapter 3 믿기에 놓을 수 없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