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구경』의 저자인 나는 초졸 학력의 열아홉 살 청소년이다. 당황하지 마시라. 내 프로필이 참신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 지금 우리나라 학교는 다닐 곳이 못 된다. 당연하게도, 그래서, 안 다닌다. 좀 더 자세히 이유를 대라면 3박4일 쉼 없이 떠들 수도 있겠으나, 『책구경』의 관점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공부하느라 바빠서(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다는 걸까) 책 읽을 시간도 없는 하루하루가 언짢아서 때려치웠다.
『책구경』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않지만 배우고 공부하는 원래적 의미의 학생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독서교육은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학생독서유감(學生讀書遺憾)’이다.
---「머리말」중에서
나는 초경을 한 이후부터 생리나 월경 대신 ‘우주의 기운’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날’이나 ‘마법’ 등 숨죽이고 에둘러서 표현해야 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슬픔과는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생리현상’을 포함한 ‘생리’라는 광범위한 용어 속에서 나의 피와 방귀를 구별하고 싶었다. 긍정적이고 의미부여할 수 있는 말을 원했다. 앞으로 몇십 년 동안 매달 겪게 될 일을 귀찮고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주일을 우주가 내게 아주 예리한 감각과 풍부한 자연의 에너지를 선물해준 시간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논란이 된 대통령의 ‘우주의 기운’ 발언이 있기 한참 전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대통령의 유명세를 이기지 못하고 ‘우주의 기운’이라는 나의 언어를 빼앗기고 말았다. 좌절감에 빠져 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언어를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언어를 왜곡시켰다고 해서 우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이 쓰던 말이라고 해서 혁신과 창조를 그만둘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페미니즘, 그건 ‘심하게못배워처먹어서’ 그렇다」중에서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비(非)인간들이 다반사로 보인다. 『한국 자본주의』 장하성’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런 비(非)인간들의 비(非)정상적인 사고는 대학마저도 비(非)교육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이제 대학이 기업화되었다는 지적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되묻는 사람들만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대학의 기업화는 좋고 싫음을 따질 만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사안이다. 기업은 입맛에 맞는 졸업생을 원하고, 대학은 돈줄을 원하고, 학생은 취업을 원한다. 아니, 취업밖에는 길이 없는 세상에 방치되어 있다.
---「디스토피아, 해마다 세월호 두 척이 침몰하고 있다」중에서
페미니즘이 어려운 건 못 배워서 그렇다. 이런 책을 선물해주는 나라에서 교육받지 못해서 그렇다. 가방끈이 아무리 길어도 소용없다. 이 나라에서 가방끈이 길다는 건 오히려 남성 중심 엘리트주의 문화에 더 깊이 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건 더욱 ‘심하게못배워처먹어서’ 그렇다.
---「페미니즘, 그건 ‘심하게못배워처먹어서’ 그렇다」중에서
조태오는 잡혀 들어갔지만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깨끗할 리 없는 회장님은 아직 건들지도 못했다. [베테랑]은 법의 한가운데서 무법자처럼 굴며 통쾌함을 선물하는 대부분의 형사 캐릭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영화다. 재밌지만, 그 통쾌함의 깊이가 너무 얕다. 영화에서조차 법의 원칙과 가치보다 한 사람의 양심과 용기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 조태오 같은 철없는 미친놈에겐 법보다 회장님의 카드 끊기가 직빵일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맴돌던 또 하나의 생각.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출석했던 대기업 총수들은 창업주가 아닌 2세, 3세들이다. 그 청문회에는 조태오가 몇 명이나 앉아 있었을까.
---「광장의 독서, 독서는 광장에서 시작됐다」중에서
나는 유토피아란 지향이고, 지향에는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는 어느 지점에 정체하는 존재가 아니다. 경계선을 넘으면 펼쳐지는 신세계도 아니다. 티끌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세상도 아니고, 위중한 환자가 치료받는 무균실도 아니다.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를 기억하고 경계하는 지점이 아닐까. 그래서 세월호는 이 사회의 결점이 아니라 유토피아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유토피아, 모른 체하고 있을 뿐이다」중에서
책읽기는 세상읽기다. 책구경은 내가 촛불, 탄핵, 대선으로 이어지는 지난 1년을 해석하고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시작한 독서는 날마다 초유의 사태를 거듭하는 뉴스를 거치고, 기꺼이 자신의 사유와 기록을 내어준 작가들의 문장을 거쳐, 다시 나에게 질문으로 돌아왔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다시, 독서는 광장에서 시작됐다」중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고양이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밥 주는 사람을 주인이 아니라 집사로 여기는 삶. 절대 순종하지 않는 삶. 햇볕을 즐기고 낮잠을 일삼는 삶. 오래오래 자신을 핥고 돌보는 삶. 아픈 친구에게 기꺼이 체온을 나눠 주는 삶. 아기 고양이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사랑하는 삶. 남들이 아무리 허접하다고 비웃어도 태연한 삶. 내가 좋아하면 그만이라며 상자에 쏙 들어가는 삶(고양이는 좁은 공간을 좋아한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기품이 느껴지는 삶. 꼬리의 솔직한 감정표현을 숨기지 않는 삶. 예쁜 것을 보면 동공이 확장되고, 거지같은 것을 보면 눈을 세로로 뜨며, 눈동자에 우주를 품고 사는 삶.
---「유토피아, 모른 체하고 있을 뿐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