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품고 있던 꿈을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요셉을 통해서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가 의미가 있는 것은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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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심은 하나님이라서 당연한 일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선함과 의로움을 자랑할 수도 없고,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자기들의 구원자가 된 것을 알았을 때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야 마땅했던 것처럼 저를 비롯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래서 “오직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p. 42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원하심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가난해도, 남들보다 못난 것 같아도, 지금 극한의 고난을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아도 견뎌주시기 바랍니다. 이 견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곧 형통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요셉이 그것을 견딤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 p. 57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했다는 말은 세상의 기준과 요구를 따라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살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지금 그것 아니면 죽을 것 같은데, 그것 아니면 망할 것 같은데, 내게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내가 놓겠습니다, 내가 용서하겠습니다, 내가 한번 더 참아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믿어 보십시다.
--- pp. 71-72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조차도 마치 출세가 목표인 것처럼 출세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불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부자가 되게 하시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더니 자녀들이 복을 받게 하셨다는 말이, 사업이 잘되고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은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물임은 인정하지만, 재물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어진 권력과 재물은 언제나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수단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 pp. 94-95
그런데 지금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그분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우리와 화해하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데, 우리를 끌어안고 내 아들, 딸이라 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우리와 화해하시려는 그 하나님 앞에서 망설입니다. 삶이 버거워서 교회에 실망해서 하나님을 자꾸 떠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죽음의 절망 앞에 있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 하시는데 우리는 지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고, 교인들과 수준이 맞지 않아서 망설입니다.
--- p. 116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나그네의 여정일 뿐입니다. 요셉이 내 해골이라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 달라는 그 고백은, 그가 총리가 되었어도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거들먹거리며 이제 좀 누려보자고 말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었고, 배반과 모욕을 당하고 팔리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형제를 끝까지 사랑하게 만들었던 힘이었습니다.
--- p.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