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듣는 설교’와 ‘읽는 설교’는 양식(樣式)이 다릅니다. 각 양식마다 장단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듣는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이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설교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에 따라 청중의 반응을 즉시 확인하고 바로바로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고조된 분위기 때문에 설교 내용이나 말투가 좀 투박하고 거칠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한편 ‘읽는 설교’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쓰고 여러 차례 다듬는 과정에서 좀 더 정교한 논리로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강점이 있으나, 독자의 반응을 즉시 확인할 수 없어서 설교 현장에서의 생동감(상호 교감)이 약해지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말로 했던 설교를 읽는 설교로 양식을 바꾸는 작업은 그래서 늘 조심스럽고, 어떤 점에서는 강해 내용을 전체적으로 다시 써야 하는 수고가 뒤따릅니다. 다만, 수련회 현장에서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독자 여러분께서 이 책을 읽을 때도 큰 은혜와 함께 여러분을 진리의 바다로 힘차게 이끌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글을 썼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아쉬움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들께서 사랑으로 용납하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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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신앙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빌립보서를 깊이 읽으십시오. 충성스런 기독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빌립보서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자녀를 신실한 신앙인으로 기르고 싶으십니까? 빌립보서를 늘 가까이 하십시오. 혹시 지금 마음 아프게 고통당하는 일이 있습니까? 빌립보서를 가까이 두고 깊이 읽으며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공책을 챙겨 도움말을 꼼꼼히 잘 적어 놓으십시오. 그렇게 만들어진 빌립보서 자료를 나중에 가족 성경공부 모임에서 열심히 활용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보서 전체를 한꺼번에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 것 같습니까? 몇몇 분에게는 한두 번 더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 ‘같은 마음’으로(빌 2:2) 최선을 다해 이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pp. 13-14
성화(聖化) 과정(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살 힘을 주시면, 성도는 그 힘으로 열심히 노력함으로 성화되어 갑니다. 이른 바 ‘신(神)-인(人) 시너지 사역’을 통해 성도가 점차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12절의 “그러므로”는 앞 단락에서 이야기한 바,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높아지심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했던 말씀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복종’의 반대말은 ‘오만(자만)’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 힘을 지나치게 믿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만한 자세를 항시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지나친 자기 비하(卑下) 또한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이 양 극단을 피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 안에서 행하신 바를 너희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늘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공동체의 건강을 계속 회복하고 유지시키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 p. 154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계속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라지 않으면 그 부모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혹시 ‘내가 자라지 않는 아이’는 아닌지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계율주의자들의 외식(外飾)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겁 없이 똥 덩이를 자랑하던 과거와 완전히 헤어져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수많은 증인들(전도자들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어두운 이 세상에 영적인 삶의 본보기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후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돈과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자족, 평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급으로 만족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자기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에게 무한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같은 분들의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열심히 본받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 가운데 ‘연아 키즈(kids)’가 있고, 골프 선수 가운데 ‘세리 키즈(kids)’, ‘인비 키즈’가 있습니다.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훗날 당신의 이름을 딴 ‘신앙의 키즈’가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 안에서 부디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주십시오.
영적인 기쁨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아갈 때, 그리고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할 때, 기쁨이 옵니다. 기쁨은 외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힘(내공)에서 나옵니다. 소유와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존할 때 무한한 기쁨이 옵니다.
--- pp. 346-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