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닙니다. 조용한 가운데 가장 깊숙한 데서 나직이 들려오는 강물소리와도 같은 ‘내심의 소리’야말로 곧 우주 질서의 하모니입니다.
--- p. 11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 집착 때문에 눈과 귀가 닫혀버린 여러분은 느끼지도 보지도 못할는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죽음의 시간을 향하여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
--- p. 19
한 여름철, 찌는 듯한 무더위에 지쳐버린 젊은 수행자가 늙은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스님은 조금도 더위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젊은 수행자에게는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참선에만 몰두하는 늙은 선사의 거룩한 모습이 감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더위야 나도 느끼고 있지.”
선사가 대답하자 젊은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어찌 그다지도 조용히 앉아 참선에 몰두할 수 있습니까?”
늙은 선사는 타이르듯이 말했습니다.
“더울 때는 철저하게 더워하라.”
--- pp. 24-25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요, ‘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반대로 ‘나를 찾는 것’은 ‘나를 가장 잘 살리는 것’이고, 내가 정말 살아있는 정신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갈 때 우리 고유의 문화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요, 소중한 나를 그릇된 쪽으로 흘러가지 않게 지키는 일입니다.
--- p. 37
명경지수와 같이 투명한 마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如如〕 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파동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로 비추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집착이 일어나면 그 집착 때문에 파동이 생기고, 파동이 생기면 마음의 평면에는 굴절이 일어납니다. 굴절된 평면에는 사물이 그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따라서 만물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 pp. 69-70
반야바라밀’의 반야般若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도’를 직관하는 지혜로, 태양처럼 밝은 광명입니다.
반야는 고요히 관하고만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행行하는 지혜’입니다. 이 ‘행’을 불교용어로 바라밀波羅蜜이라고 합니다.
반야가 ‘눈’이라면 바라밀은 ‘발’입니다. 아무리 눈이 밝더라도 발이 없으면, 등대 같이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소극적인 지혜로만 만족해야 합니다. 또 아무리 발이 튼튼하더라도 길을 인도하는 눈이 없으면 그 발의 갈 길은 맹목적이기 때문에 위태롭습니다. 눈과 발이 서로 일치할 때 반야바라밀이 성취됩니다.
--- p. 90
반야가 ‘밝은 눈’을 지칭한다면 자비는 ‘뜨거운 심장’이요, 보시는 ‘걸어가는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밝은 지혜가 없는 자비보시는 불빛 없이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이 위태롭고, 자비보시 없는 지혜는 돌처럼 굳어버린 정불이 되어 고요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위하고 나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 행복하고 평화로워진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나를 비우고 지혜와 자비와 보시의 길을 걸어갈 때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평화와 행복과 자유가 ‘나’에서만 그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로 널리 널리 퍼져갑니다.
--- p. 113
부처님께서는 고해苦海에서 울고 있는 중생을 보다 못해 스스로 열반의 세계를 버리고 내려온 자비의 화신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따르는 우리는 자아완성을 위해 부지런히 ‘올라가는 길’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그 올라가는 길이 중생의 역사로 ‘내려오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곧 세속을 향해 내려오는 길이 바로 올라가는 ‘열반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향해 올라가는 열반의 길이 중생을 향해 내려오는 세속의 길과 마주칠 때 불교의 자비가 완성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능력껏 참선 · 염불 · 경전공부 · 기도 등을 닦아 열반의 길을 향해 올라감과 동시에, 이웃과 중생을 돌아보는 자비심을 일으켜 능력껏 남을 돕고 깨우치고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 pp. 132-133
급변하는 이 세상에서 보살은 중생과 함께 역사적 현장에 있어야 하고, 또 그 현장을 증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불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뛰어들어가서 그 총부리를 돌려놓고자 해야 합니다. 역사적 현장에서 중생이 깨어나고 중생이 살아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생을 사랑하는 자비와 사명감으로 자리를 박차고 역사 속으로 나와야 합니다. 정치 · 경제 · 사회 구석구석이 중생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면, 불교의 보살은 그 악정이나 악행과 대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불교적 저항은 간디와 같이, 철저한 참회를 통한 자기무화自己無化요 무아無我의 방향으로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숭고한 자기희생의 저항이 따라야 합니다.
--- pp. 170-171
불교의 머물 곳은 무주처無住處입니다. 나를 위해 현실이나 중생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중생과 함께 하는 무주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녕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보살불자라면 ‘무주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집착과 탐욕의 어두운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이들의 난파선을 비추어주는 밝은 반야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결이 잔잔하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불교의 자비가 보여줄 ‘무저항의 저항’ 역시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개혁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 p.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