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심장의 소유자
마울리나는 아빠 엄마와 함께 크고 넓은 집에서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엄마와 단둘이 좁디좁은 플라스틱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게 아빠 탓이라고만 생각될 뿐……. 그래서 아빠와 두 번 다시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아빠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이제부터 ‘그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짐짓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그 사람은 할 일이 빼곡히 적힌 목록을 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장보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주둥이 왕국에서 쫓아낸 후 아주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할 날이 찾아왔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 사람과 절대로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나는 누구처럼 자기가 한 말을 쉽사리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결국 그 사람 혼자서 얘기를 해야 했다.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나 혼자 떠들어 대는 건 너도 지겹잖아. 네가 나한테 말을 건넬 때까지 기다릴게. 뭐든 생각나면 말해 줄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입이나 다물어 주시지! 나의 침묵이 어지간히 견디기 힘들었나 봐? 아무 소리나 마구 지껄이는 걸 보니……. 당신이란 사람은 원래 그랬지? 백번 천번 혼자서 떠들어 보라고. 입만 아플 테니까.
그 사람은 미래에 닥칠 일을 진지하게 내다보았을 거다. 그래서 겁에 질린 암탉처럼 재빨리 도망쳐 버린 거겠지. 그래, 당신은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너무 피곤한 일이니까. 당신 같은 사람에게 장애를 가진 아내라니! 당신에게 심장이란 그저 피를 끌어올리고 내보내는 근육 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당신 가슴속에는 자신을 위한 공간밖에 없으니까. 좋을 때나 가장일 뿐……. 두고 봐, 당신에게 절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13~14쪽에서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 것
마울리나는 엄마가 거리에서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엄마의 병은 신경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파괴되는 것. 2미터를 걷는 데 이 분이 걸릴 정도로 다리에 힘이 없다. 혼자 거리로 나섰다가 쓰러져 곤욕을 치른 엄마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파 눈물을 머금는다.
“편지를 우체통에 갖다 넣느라 무리를 좀 했어……. 한 100미터쯤 갔을까……, 살짝 오르막길이 나오더라. 거기만 지나면 큰길이거든. 전에는 몰랐는데, 오늘따라 무진장 힘에 부치더라고…….”
엄마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2미터 가는 데 이 분은 더 걸렸을 거다. 엄마의 병은 신경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파괴되는 것이었다. 마치 쥐가 전선을 갉아 먹어 치우듯이. 그러다 보면 합선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엔 전기가 끊기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너무너무 피곤해서 나무에 기댔는데, 그만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린 거야. ……근데 무서운 건 주위에 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는 거야. 혼자 일어설 수도 없는데…….”
“전화는 왜 안 했어?”
“그게……, 전화기를 안 가져갔지 뭐야.”
엄마는 졸린 듯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근데 말이지……. 딱 하나, 진짜로 괴로운 일이 생겼지 뭐야. 그게, 쉬가 마려운데 참기가 어려운 거야. 정말로 끔찍했지. 길거리에 딱정벌레처럼 드러누운 채…… 아기처럼 바지에 실례를 해 버렸으니.”
“엄마!”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어. 그때 차 한 대가 멈추더니 젊은 여자가 내려서 나를 일으켜 세우고 루드밀라에게 전화를 해 줬지. 루드밀라는 결국 못 볼 꼴을 다 봐 버렸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
걷다가 넘어져서 길거리에 누워 있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근데 뭐? 옷에 오줌까지? 그건…… 너무너무…… 장애인 같잖아!
엄마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나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65~66쪽에서
내 인생의 가장 멋진 기억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엄마 아빠의 직업 소개하기’라는 주제로 십 분짜리 발표를 하게 한다. 엄마는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나고, 아빠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파울에게는 이 발표 수업이 징그러울 만큼 싫은데……. 그런 마음을 너무도 잘 아는 마울리나는 파울의 엄마와 아빠의 직업을 지어내서 발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수학 공부를 하는 동안, 파울은 화분에 물을 주었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흙을 만져 보면서 정성 들여 물을 뿌렸다. 이제는 화분을 돌보는 것이 파울의 일과가 되었다. 내가 한창 소수점 문제를 풀고 있을 때, 빨간색 물뿌리개를 손에 든 파울이 방 한가운데서 외쳤다.
“난 발표를 하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냥 십 분짜리 발표일 뿐이야. 질문이 서너 개쯤 나올 테고……. 그러면 끝이야.”
“아니, 난 서커스의 어릿광대가 아니라고. 너야 훌륭한 부모님이 계시니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겠지.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지만 난 아냐. 난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아.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생활이잖아. 그 누구도 나에게 그런 걸 말하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어.”
“파울, 너희 아빠에 대해선 내가 거의 다 지어냈어. 이제 너희 엄마 부분만 해결하면 돼. 아무 걱정 하지 마. 그것도 식은 죽 먹기야!”
파울이 물뿌리개를 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흥, 너한테나 엄청 쉬운 일이겠지. 우리 엄마 얘기도 지어내겠다고? 난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데? 엄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딱 네 가지야. 진짜로 네 가지뿐이라고!”
파울은 엄지손가락을 접은 채 네 개의 손가락을 내 코앞에 바싹 들이밀었다. 손바닥 뒤로 파울의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입이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목에 핏대가 선 것까지 다. ―71~72쪽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