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는 ‘파국’을 기피하는 시대다. 우리는 생산력이 모든 결핍을 채우고,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주의가 모든 이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어떤 도저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간지奸智를 발휘하며 신들의 시험과 괴물들의 손아귀를 피해 페넬로페의 품으로 돌아간 오디세우스처럼, 이 시대는 기존의 생산력과 과학기술과 시스템을 물신화함으로써 다른 모든 균열을 덮고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가장 실제적인 파국의 가능성에 직면한 시대다. 도처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몰려오고, 봉기가 발생하고, 경제위기가 반복되고 있다. 부자들이 하늘에 닿은 바벨탑 위로 올라가는 반면 빈민들은 점점 지하로 내려가고, 그 중간에 있었던 이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어떤 재난도 극복하는 국가, 그 어떤 위기도 이겨내는 시장의 힘을 맹신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높아가는 허무와 불안과 분노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견뎌내는 전쟁 같은 삶을 산다. 체제가 유토피아를 설파하는 동안 인민은 디스토피아를 예감하는 균열이 있고, 문화는 파국에 관한 상상력으로 그 균열을 채운다. --- p.12
이러한 상황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디스토피아적 파국의 상상력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해야 할지, 어떻게 정규직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해고되지 않을지, 어떻게 노후를 보낼지에 대해 언제나 고민 중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용산의 참사가 2년 넘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백수 취업준비생’을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언론사의 사장과 진행자와 프로그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평등과 자유를 진전시키는 법률안들이 상정도 되지 못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면서, 이미 디스토피아적 서사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 더 이상 진정 유의미한 역사 발전이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공포, 이미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희망의 목표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 좌절, 내가 지금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다는 그 절망, 이런 디스토피아적 감성이 우리 삶의 서사 위에 짙게 드리워 있는 것이다. --- p.20
국가는 사라지고, 사회는 녹아내리고, 남는 것은 개인의 ‘각개격파’뿐이다. ‘필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이 개인적 차원으로 파편화한다는 것은 근대의 ‘사회계약’ 상태가 해체되고 다시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가 되는homo homini lupus’ 홉스적인 무한 투쟁의 상태로 퇴보함을 뜻한다. 바우만이 우리의 시대를 ‘사냥꾼의 시대age of hunters’에 비유하는 것 역시 이런 의미다. --- p.33
오늘날 세계의 재앙과 무질서, 한국의 불안과 참사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요소는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의 실현과 같은 근대적 이데올로기들이 요란한 말 속에서 녹아내려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국가도 사회도 이념도 이상도 실체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생존투쟁과 안전 강박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회 속의 개인은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에게 늑대가 되어 자신의 먹잇감을 찾아 헤매며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원칙은 희소성이고 폭력이고 쾌락이다. 이 무한 투쟁 속에서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를 자신의 부富가 낳은 권태를 몰아내는 게임의 대상으로 소비할 것이다. 승리자와 패배자의 범주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유전자의 우위성’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하고 있다. --- p.39
그렇다면 좀비는 포스트-정치적 상황과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날로 분명히 몰고 오고 있는 파국의 분위기에 최적화된 주체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인 것을 개인화하고, 이윤을 위해서 자원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구적 환경문제는 외면한다. 이로 인해 결국 사회적 갈등과 지구적 문제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상황을 파국이라 할 때, 그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를 우리는 좀비라는 아이콘을 통해 발견한다. 좀비는 파국의 상황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파국을 전파하는 존재다.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이 모순적 존재는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모순이 터지는 날, 어쩌면 ‘우리’는 ‘그들’ 중 하나가 되어 파괴된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좀비가 좵 우리들에게도 진정한 파국은 그레이의 무관심과 이본의 무표정이 아니라 저 안티고네의 죽음충동을 통해 올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파국인 이유는 오직 무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고귀함을 지향하는 강력한 하나의 의미가 그녀의 결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맞이하는 파국은 테베를 넘어선 더 큰 세상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김길태와 천안함이 상징계의 균열을 보여주었던 시간에, 자신을 얽매던 대학이라는 질서를 깨고 더 거대한 것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간 김예슬의 ‘죽음충동’은 그 균열 속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 어떤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 슬쩍 그 얼굴을 비쳤던 순간을 가리킨다. 모든 진정한 파국은 불가능성만이 아니라 가능성도 함께 끌고 들어온다. --- p.74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 자체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다.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 신호가 열어젖히는 ‘공백기interregnum’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욱 근원적인 질문들을 먼저 대면해야 한다. 그 질문의 시작은 바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에 관한 것들이다. 과연 자본주의의 붕괴는 가능한 시나리인가?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꿈꾸기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기획인가? 아직도 유토피아가 가능한가? 그것은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길로 우리를 이끌지는 않을까? ‘나도 잘 알아, 그러나’라는 형식으로 대변되는, 지젝이 말하는 ‘냉소적 페티시즘’의 일반화 현상에 대해 좌파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 pp.126~127
아포칼립스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의 ‘현실주의’가 가진 보수주의 정치학의 속성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과 토스카노의 ‘광신의 정치’가 가진 급진적 정치학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으로 귀결될 수만은 없다. 파국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대면하는, 대면해야 하는 딜레마가 이것이다. 아포칼립스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사는 자세를 취할 수도, 현실의 자원에 대한 정교한 분석 없이 보편성과 평등에 대한 ‘열정’과 ‘광신’의 정치를 외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레이와 토스카노가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낸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딜레마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정치politics’를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현실이 본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의 상황 속에서 결단을 내리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련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p.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