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애피타이저
쌓인 눈이 아직 남아 있고 차가운 밤하늘의 별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저녁이었다. 얼어붙을 것 같다란 말은 이런 밤에 이런 밤에 쓰는 말일까. 장갑을 끼고 얼얼해진 귀를 감싸며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었다. 친구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자, 어서 들어와. 너무 춥지? 저런, 코트도 꽁꽁 얼었네.”
테이블에 앉아 건네준 따뜻한 물수건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바로 ·인용 작은 질그릇냄비를 내왔다.
“뜨거우니 조심해.”
뭐지……. 계란찜인가…… 하고 냅킨으로 살짝 뜨거운 뚜껑을 열어보니,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새빨간 잔 새우가 폭폭 소리를 내고 있었다. 후후 불어가며 입에 넣으니 마늘 향과 새우의 감칠맛이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테이블에 놓인 프랑스빵을 손으로 뜯어 조금 남은 국물까지 남김없이 찍어 먹었다. ---p.27
물웅덩이
집 앞 도로가 새로 포장되었다. 전에는 네모난 콘크리트 블록이었는데 이음새 없는 아스팔트가 된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놀랍게도 도로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평평하게 공사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울퉁불퉁하다니. 물웅덩이를 밟지 않으려고 깡충깡충 건너면서 어쩌면 공사를 이렇게 했을까 싶어 화가 났다.
비가 갠 일요일, 창가에서 문득 물웅덩이가 있는 보도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맑게 개어 웅덩이에도 그 하늘이 옮겨와 앉아 있다. 그러고는 뭔가가 훌쩍 내려왔다. 작은 참새였다. 기분 좋게 물을 먹고 있다. 또 한 마리가 내려왔다. 참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고는 함께 날아갔다.
내가 화를 냈던 그 물웅덩이가 참새들에게는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도시는 어디나 할 것 없이 포장이 되어 있다. 원래는 흙으로 된 땅이니 자연스럽게 파이기도 하고 비가 오면 빗물이 고이기도 해서 새들이 물을 마시고 놀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땅이 모두 포장되면 새들은 어디서 물놀이를 할까.
그날은 참새가 몇 마리나 날아와 물을 마시고 갔다. 저녁 무렵에는 웅덩이의 물도 말라 있었다. 또다시 비가 와 이곳에 물이 고이는 건 언제쯤일까……. ---p.73
약
“열이 날 때 쓰도록 해.” 하며 친구가 약국에서 주는 종이봉투 같은 것을 주었다. 그리고 “열면 습기가 차니까 필요할 때 열어 봐.” 하기에 약인 줄 알고 그대로 약상자에 넣어주고 며칠이 지났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머리가 무겁고 약간 열이 있는 것 같아 친구에게서 받은 봉투를 꺼내보았다. 약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종이에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가 나왔다.
“아플 때만큼 힘들 때도 없지. 나도 그랬었으니까 꼭 전화해.” ---p.101
파이 아라모드
“갓 구운 애플파이가 있는데 어떠십니까?”
웨이터의 말에 그만 주문을 하고 말았다.
“이런 계절이니 파이는 아라모드로 할까요?”
이 또한 능숙하게 권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윽고 뜨거운 밀크티와 갓 구워 아이스크림을 얹은 파이가 나왔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파이의 단맛을 부드럽게 감싸주어 남김없이 먹을 수 있었다. 누가 이런 방법을 처음 고안해냈을까.
달콤한 파이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면 파이와 아이스크림 모두 맛이 배가 되니 신기하다. 커다란 파이를 받고 조금 싫증이 날 즈음 냉동실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어보면 역시 파이와 아이스크림 맛이 되살아난다.
1 더하기 1은 2라지만, 이 경우는 1 더하기 1이 4 정도의 맛있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p.108
바람소리
오후의 티타임을 준비한다. 홍차 캔을 열어 찻잎을 포트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찰랑찰랑 뜨거운 물이 잎을 적신다. 찻주전자를 가볍게 흔들면 포트 안에서 들리는 작은 파도소리. 호박색이 된 차를 잔에 따른다. 이 또한 조용한 소리이다.
늘 바삐 끓이던 차였는데, 오늘은 여러 소리가 들린다. 주변이 여느 때와 달리 고요하기 때문일까. 뜨거운 차에 설탕이 슈욱 하고 녹는다. 우유를 넣어 마시면서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저건 배가 출항하는 신호일까, 멀리서 기적소리가 울리고 신호가 바뀌었는지 일제히 자동차들의 엔진소리가 들린다.
문득 모든 소리가 사라질 때가 있다. 그리고 다시 커튼을 흔드는 희미한 바람소리, 작은 새들의 조심스러운 울음소리. 소리와 정적이 차례차례 일었다가 사라진다.
자연의 소리, 생활의 소리, 기계가 내는 소리, 사람들이 내는 소리.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끈 오늘 오후의 티타임은 너무나 고요해서 오랜만에 바람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p.110
상자 속의 단추
작은 상자 속에 단추가 꽤 쌓였다.
어느 옷엔가 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사가지고 온 친구, 구입한 옷에 딸린 여벌단추, 이제는 못 입게 된 옷이지만 색이나 디자인이 맘에 들어 떼어놓은 단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단추가 상자 속에 가득하다.
어제 오랜만에 요코하마의 모토마치에 갔다. 여름을 알리는 화사한 쇼윈도에서 어깨에 메는 작은 포세트가 눈에 띄었다. 가로 10센티, 세로 14센티 정도의 포세트 전체에 단추가 달려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하나하나 단 모양인데, 크기와 모양, 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작은 추상화 같은 디자인이었다.
빨강, 하양, 노랑, 회색, 파랑, 금과 은 등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바탕인 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체가 단추다. 그리고 깜장과 은색의 줄이 숄더백 정도의 길이로 달려 있다. 파티용 포세트일까.
어느새 가득 모인 내 작은 상자의 단추들로 어서 뭔가를 만들고 싶어진다. ---p.155
옷깃과 소맷부리
옷장을 열어보니 블라우스가 많다.
그중에는 옷에게는 미안하지만 싫증이 난 블라우스도 몇 장이나 된다. 세탁을 하면서 지저분해지기 쉬운 것과 소맷부리를 세게 비벼 그곳만 후줄근해진 것도 있다. 검정 바탕에 하얀 잔 꽃무늬의 얇은 면 블라우스는 좋아하는 옷이라 너무 오래 입은 감이 있다.
문득 예전에 칼라를 하얀 레이스로 떠서 블라우스에 달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칼라만 흰색으로 바꿔보고 싶어졌다.
곧바로 하얀 얇은 모직으로 깃과 소맷부리를 만들어 바꿔 달았다. 낡은 블라우스가 갑자기 젠체하며 외출용 혹은 파티에서도 입을 수 있는 멋진 블라우스가 되었다. 흰색이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역할을 할까. 워낙 흰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흰 칼라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 번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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