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김치!”
“파김치!”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소리다. 파김치는 닥터 박(Doctor Park)이란 뜻의 몽골어로, 내 성인 ‘Park’에 의사를 뜻하는 ‘Emchi’가 붙어서 된 말이다. 원래는 ‘팍임치’이나 연음법칙에 의해 ‘파김치’로 소리 나는 것이다.
몽골에는 두 종류의 의사가 있다. 6년제 정식 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이흐임치(큰 의사), 4년제를 나온 의사는 박임치(작은의사)라고 한다. 박임치는 주로 지방의 보건소 등에서 일차 진료를 담당한다. 처음 몽골에서 나를 ‘박임치’(내 성인 ‘박’에 ‘임치’를 붙인 말)라고 소개했더니 그러면 박임치(작은 의사)와 헛갈려 정식 의사가 아닌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는 수없이 ‘박’의 영문 표기인 ‘Park’에 ‘Emchi’를 붙여 ‘팍임치’로 소개하게 되었고,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는 여기저기서 팍임치를 찾는 사람이 수두룩해졌다.
어느 날 몽골에 들어온 단기팀이 사역을 마치고 마지막 날 병원에서 마무리 모임을 가질 때였다.
“왜 몽골 사람들은 선교사님을 자꾸 파김치라고 불러요?”
한 집사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은 이어서 말했다.
“너무 일이 많아서 파김치처럼 녹초가 되어서 그런 건가요?”
집사님의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파안대소했다.
‘그렇구나, 그게 한국말로는 파김치가 되는구나!’
자연스럽게 기도 제목도 ‘파김치’가 파김치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되었다.
그 후 나의 몽골 명칭은 누구나 알기 쉬운 파김치가 되었다. 지금도 한국 식당에서 반찬으로 파김치가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 pp.13-14
전날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얼마나 평안하게 수술을 했던지… 수술하는 내내 침착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며 책에서 본 그림대로 수술을 잘 마쳤다.
수술 결과는 어땠을까? 정상이라면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다음날부터 연결 부위 밑에 유치한 배농관으로 담즙이 500cc쯤 나오기 시작했다. 클립으로 물린(복강경 수술 시 수술 부위를 클립으로 물려 놓고 수술한다) 부위에 연결해서 생긴 문합부 유출이었다. 이런 수술을 하고 나면 어느 정도 문합부 유출이 생기는 게 다반사지만, 거의 생담즙으로 500cc가 나오니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대개는 이렇게 나오다가 5-6일 지나면 양이 줄고 멎기 때문에 기다려보자 싶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양이 줄지 않았다. 구멍이 막히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국 같으면 다른 방도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곳에선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열흘이 지났다.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 한마디로 펑펑 울고 싶었다. 하는 수 없이 환자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같이 기도해 보자며 환자의 손을 잡고 아침저녁으로 통성으로 기도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기도만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성경도 같이 읽어 볼래요?”
이판사판이었다. 환자도 위기를 느꼈는지, 세상에나 하루 만에 신약을 완독했다.
“잘하셨어요. 이제 구약도 읽어 보세요.”
환자가 구약을 반쯤 읽었을 때는 수술 후 15일째. 그런데 정말 기적같이 전날까지 매일 500cc 나오던 담즙이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기뻐하기보다는 너무 놀란 나머지 내 눈을 의심했다.
‘혹시 막힌 게 아닐까? 뱃속에 고인 게 아닐까?’
초음파도 찍어 보고 진찰도 여러 번 했지만 괜찮았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왔다.
그 환자는 3일 만에 성경을 다 읽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녀는 내가 사역하는 교회에 나와 양육 받고 좋은 리더로 성장하였다. 할렐루야! --- pp.17-19
몽골로 향하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수없이 서원을 했기에 내 마음은 늘 선교에 대한 부담으로 무거웠다. 매일 반복되는 좌절감과 패배감 때문에 더 그랬다.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 회복되지 않으면 선교에 대한 꿈을 접겠다는 마음이 강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한편으론 회복되고 싶은 열망이 타다 남은 불씨처럼 타고 있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최악의 상태지만 하나님께서 이대로 나를 버리시지는 않겠지, 사도 바울처럼 눈이 멀든지 무슨 기가 막힌 일로 나를 회복시키시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너울거렸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돌아가야 하나.’
‘돌아가서 재학이를 무슨 낯으로 보지?’
마지막 날 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방에서 나와 호텔 앞 벤치에 앉았다.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는 밤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진료한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파노라마처럼 그들의 얼굴이 죽 지나갔다. 그 끝에 “저들을 위해서 누가 갈까. 나는 저들을 위해 너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씀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얼마나 울었는지 알 수 없다. 회개와 감사, 하나님의 은혜와 온화한 부르심으로 인한 목메임이었으리라.
...
나의 회복을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재학이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고 하더라. 그 말씀을 듣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재학아, 나 이제 회복됐어. 남은 기간 잘 준비해서 나갈 거야. 너도 얼른 일어나 같이 가자.”
재학이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떳떳하게 얼굴을 마주하며 이런 얘기를 나눈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재학이에게 고마웠고, 그런 만큼 더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재학이는 이후에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재학이한테 전화가 왔다.
“관태야, 미안해. 난 아무래도 함께 못 갈 것 같아. 내 몫까지 부탁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재학이 너는 갈 수 있어. 걱정하지 말고 힘 내.”
이것이 재학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내 몫까지 부탁한다’는 재학이의 말은 유언이 되어 버렸다. 다음날 재학이는 의식을 잃고 사흘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1999년 11월 9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몸은 비록 떠났지만 재학이는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몽골에서 4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아산병원에서 일하게 됐는데, 좋은 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다 보니 그 자리에 안주해 편하게 살고 싶고, 세상에서 더 유명해지고 싶은 유혹이 슬그머니 머리를 든 것이다. 그때 흔들리는 나를 바로잡아 준 이도 재학이다. 재학이의 유언, 재학이와의 약속이 나를 늘 깨어 있게 한다.
처음에는 약속 때문에 의무감으로 선교 사역을 했지만, 지금은 사역이 재미있고 좋으니까 한다. 그러니까 자연스레 열매가 맺히고 사역도 점점 더 커진다. 그것을 보면 기쁘고, 기쁘니까 열매가 커지고… 이렇게 선순환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언제나 재학이와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로제타 홀이 고려대학 의대에 베푼 빚을 갚으려는 마음이 있다. 내가 로제타 홀의 후예라면 재학이는 나에게 윌리엄 제임스 홀과 같은 사람이다.
지금도 돌아보면 나같이 연약한 죄인을 부르시고 써 주시는 것이 망극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나는 한 번도 내가 하나님 앞에 귀한 헌신을 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 pp.41-45
분주, 많은 일, 염려, 근심… 어느 것 하나 내게 해당되지 않는 단어가 없었다. 나는 30년 동안 주님 안에 있었지만 단 한순간도 분주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늘 많은 일로 분주하면서 사역을 위한 것이라고 위안 삼았고 오히려 바쁜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너무 바빠서 주님을 잊고 산 적도 많았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지난 시절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몽골에 가서도 전처럼 살려고 하니? 이제는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만 잡고 가지 않겠니?”
나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순종의 고백을 하는 순간 영안이 열리며 누가복음의 이 말씀이 내 영혼 깊숙이 박혀 들어왔다.
마르다는 분명히 선한 동기로 시작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방문했으니 해드리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음식 접대가 아니라 그의 전인격을 원하셨던 것이다.
나도 마르다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다. 내가 환자도 많이 고치고 의료선교도 잘해서 주님께 한상 잘 차려 드릴 테니 주님은 잠자코 앉아서 내가 차려 주는 상이나 받으시면 됩니다, 이런 식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주님께 내 방식의 사랑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말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주님은 참으로 오랜 시간 마르다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기다리시던 것처럼 나를 기다려 주셨다.
“주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죄송해요, 주님….”
그러고 나니 내 안에 있는 마르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 pp.50-51
이 사역을 준비하면서 나는 현지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미리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내가 아무래도 현지 선교사였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설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는데 그것을 참조해서 선교사들이 원하는 품목으로 구성해 패키지를 만들었다. 고추장, 새우깡, 둥지냉면, 짜파게티, 신라면, 반건조 오징어 등으로 특별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선교사님 수만큼 만들어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많은 단기팀들이 왔지만 우리를 위해 이런 것들을 준비해 온 팀은 처음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진풍경(?)이 벌어졌다.
“선교사님, 둥지냉면하고 신라면 바꾸실래요?”
“우리 애들이 새우깡을 좋아해서 그러는데 혹시 다른 것과 바꿔 주실 수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며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책도 들었다.
‘선교사님들을 이 전방에 보내 놓고 우리가 너무 안 돌아봤구나! 이제라도 선교사님들을 잘 도와드려야겠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줘야겠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의료 선교와 지역 개발을 동시에 추진했다. 그전에 혼자 다닐 때는 의료 선교밖에 할 수 없었지만 활동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이다. 실제로 아픈 곳을 치료해 주는 일만큼이나 그들에겐 우물을 파서 식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시급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료 선교만큼이나 복음의 통로 구실을 톡톡히 했다. 실제로 한 지역에 우물을 파 주면 사람들은 복음에 마음을 열곤 했다.
2011년 2월에 있었던 아이티 단기선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의료 선교와 지역 개발, 문화 선교가 결합된 것이다. 환자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것은 물론 우물을 파 주고 마술 공연도 하고 가수와 사진작가가 함께 그들의 마음을 터치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접근했다.
앞으로 후방 사역을 전개할 때 이 세 가지, 즉 의료 선교와 지역 개발, 문화 선교를 결합해 추진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을 생각이다. 지역 개발의 경우 우물 파 주기를 넘어 학교나 보건소 등을 세우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문화 선교도 좀 더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 pp.256-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