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신화는 과거와 같은 속 시원한 정답이 아닐지 모른다. 죽음을 극복하게 해주지도 못하고, 병자를 치료해주지도 못한다. 현대인은 지진이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가 지각 변동에 따라 분출되는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사실도 안다. 죄를 많이 지었다고 지진이 더 자주 더 세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화는 오히려 질문으로서 더 의미 있는 기능을 발휘한다. 질문의 한 형식으로서 신화는 과학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오히려 사실의 표층에 잘 드러나지 않는 진리까지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인류에게 일정하게 길을 가르쳐주는 지도로서, 나침반으로서, 내비게이션으로서 기능한다면, 상당 부분 그것은 바로 이런 알레고리를 통해서이다.
---「제1부 오늘 우리에게 신화란 무엇인가」중에서
신화의 알레고리가 가장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가장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처럼 우주와 시간이 처음 시작되던 때일 것이다. 아무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어쨌거나 그때 그 순간은 가장 장엄하면서도 시시하고, 가장 진지하면서도 허탈하고,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그저 그랬을지 모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세상이 처음 열리던 개벽이나 세상을 처음 만들던 창세의 신화도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넘어서서 어떤 분명한 목적의식, 분명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3부 아주 많은 것들의 시작」중에서
마우이 같은 신화의 주인공을 ‘트릭스터’라고 한다. 영어로는 트릭(trick)이 속임수나 장난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트릭스터(trickster)는 사기꾼이나 협잡꾼, 아니면 좋게 봐줘도 장난꾸러기 혹은 재주꾼 정도로 간주된다. 문화인류학에서는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 속 인물이나 동물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융은 트릭스터가 하나의 원형으로서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인 그림자(umbra)의 표상이라고 주장했다. 중요한 점은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기존의 도덕과 관습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지켜야 할 사회 질서 역시 강압(독재)에 의한 비민주적 질서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런 도덕과 관습, 그리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어떤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트릭스터는 기존의 지배적인 질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든지 중심을 향한 그 공고한 구심력을 흩어 놓는다든지 하는 교란자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우리 탈춤의 말뚝이는 물론, 김삿갓(김병연)이나 김선달은 철저한 신분제와 엄격한 유교 윤리로 유지되던 조선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의 칼날을 들이민 일종의 트릭스터로 기억할 수 있다.
---「제6부 신화세계의 영원한 이단자」중에서
당연한 말이겠지만, 진화론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에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인간이 달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에도,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인간이 만든 알파고가 인간계 최고 기사들을 여지없이 격파한 지금도 신화의 종언을 장담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신화는 늘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활력이 모두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은 경우 그 활력은 소비의 영역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커피의 신화, 스타킹의 신화, 자양강장제의 신화는 어쩌면 지난 시대 신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의 대신 연극이, 서사시 대신 소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신화가 오직 상품경제의 영역에서만 소비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앞서간 비관주의일 것이다. 시장과 교환이 곧 신화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8부 신화, 오늘의 이야기」중에서
도대체 세상은 왜 창조되었는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창조주가 완벽한 절대지존이라면서, 왜 우리 인간은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는지. 아니, 창조주는 또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디서든 오지 않았다는 말은 도무지 납득도 되지 않고, 요령부득이니까. 자재(自在), 즉 저절로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왜 오늘은 어제가 아닌가. 밤은 왜 오는지. 달은 왜 이지러지고 또 차는지. 농부는 왜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둬들여 하는지. 노래는 어디서 왔는지. 이 세상 최초의 이야기꾼은 누구인지. 왜 아기는 자라고 노인은 늙는지. 그리고 마침내, 죽음은 무엇인지. 그것은 어째서 피할 수 없는지.
이 모든 질문이 곧 이야기였다. 인간의 우주란 곧 이야기의 우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모델로 바꾸기 위해 만들어내는 판타지이며, 인간은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만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게 한다.
---「에필로그 이야기로서의 신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