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왜 네 편의 복음서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사복음서는 각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하여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제시하려고 쓴 것이다. 아울러 각 복음서는 십중팔구 초대교회에 존재했던 각기 다른 공동체 안에서 등장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사복음서 전부를 정경(canon of Scripture) 안에 담아 놓았을까? 일찍이 사복음서를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시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디아테사론(Diatessaron, “넷을 통하여”)이다. 이는 주후 170년경에 교부 타티아누스(Tatianus)가 사복음서를 모아 만든 것이다. 타티아누스는 사복음서에서 끌어모은 부분들을 한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그 뒤로 ‘사복음서를 조화시킨’ 작품을 만들거나 복음서를 통합하여 한 이야기로 만들어 내려는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각 복음서가 독특한 문학 기록이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권위 있는 작품임을 인정하고, 사복음서를 구별하여 모두 보존하는 쪽을 택했다.
--- 「01. 복음서란 무엇인가?」 중에서
“네 자료 이론: 마가복음+Q+M과 L.” 1924년, 영국의 성경신학자 스트리터(Burnett Hillman Streeter, 1874-1937)는 고전이라 할 그의 저서 『네 복음서: 그 기원 탐구』(The Four Gospels: A Study of Origins)에서 두 자료 이론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스트리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독특하게 갖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고자 두 가지 자료를 더 제시했다. 그는 이 두 자료를 ‘M’(마태만이 독특하게 가진 내용)과 ‘L’(누가만이 독특하게 가진 내용)이라고 불렀다. 네 자료 이론은 두 자료 이론과 같으며, 다만 마가복음과 Q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독특한 내용을 설명하려고 두 자료를 더한 점만이 다르다.
--- 「02. 복음서의 기원과 본질 탐구」 중에서
우리는 이러한 내러티브 및 신학 분석을 통해 복음서 저자들과 원래 청중들이 처해 있던 역사 정황과 관련된 문제의 답을 찾아보겠다. 우리는 역사 속 저자들이 실제 청중을 상대로 쓴 것이 복음서라고 추정하지만, 우리가 그 특수한 정황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 결론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복음서를 연구할 때는 가장 확실한 것에서 가장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옮겨 가겠다. 우리는 문학적 분석을 통해 저자의 평가 관점과 신학 시각에 관하여 개연성이 있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와 청중, 저작 시기와 삶의 정황과 관련하여 잠정적이나마 어떤 결론을 제시해 볼 수 있겠다. 이것이 복음서를 가장 객관성 있게 연구하는 접근법이자, 성령의 영감과 정경 형태의 복음서를 결합해 온 것이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었다는 점에서 독실하고 경건한 접근법이기도 하다.
--- 「03. 복음서 이야기 읽고 듣기」 중에서
묵시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미지 중에는 구약의 예언자인 이사야(24-27, 56-66장), 에스겔, 요엘, 스가랴, 그리고 특히 다니엘이 제시한 종말론에서 온 것이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묵시주의자라 부를 수 있다. 의인을 구원하고 악인을 벌할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감람산 담화(막 13장과 평행 본문)와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의 묵시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 기독교 묵시주의와 유대교 묵시주의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원을 모두 가진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졌고(롬 8:24), 현재 이루어 가고 있으며(빌 2:12), 미래에 완성된다(롬 5:9-10).
--- 「05. 복음서의 종교적 배경」 중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개인의 정체성보다 중요한 맥락에서는 가족 관계가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아버지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며, 부모는 모든 면에서 공경을 받아야 했다. 부모를 존경한 까닭은 부모가 생명을 주었으며 거룩한 전통의 수호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부모는 자녀에게 그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고 삶에 구조와 의미를 부여해 준 가치들을 가르쳤다. 부모는 유업을 통해 자신들과 땅의 연관성을 확립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했다. 이스라엘의 민족 정체는 이스라엘이 그 땅(ha-aretz)을 소유한다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은 그 땅에서 누리는 풍성한 수확과 평화를 의미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파멸과 포로로 끌려감을 의미했다.
--- 「06. 복음서의 사회?문화적 배경」 중에서
내레이터는 과거의 행동을 묘사하는 데 현재시제를, 곧 ‘역사 속 현재’(historical present)로 알려진 헬라어 관용어를 사용한다(151회. 마태복음은 93회, 누가복음은 11회 사용한다). 역사 속 현재는 더 거칠고 덜 세련된 헬라어의 특징이긴 하지만(저자는 십중팔구 헬라어를 모국어가 아닌 두 번째 언어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역사 속 현재는 마치 뉴스캐스터가 현장에서 보도를 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실감 나는 느낌을 마가복음 내러티브에 제공한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예수가 바다를 잔잔케 하신 기사는 이렇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태운 채 그들과 함께 모시고 간다.…맹렬한 폭풍이 일어나…그들이 예수를 깨우며 예수께 말한다”(막 4:36-38, 저자 사역).
--- 「07. 마가복음」 중에서
학계에서는 마태복음 저자가 이 복음서를 써 보내는 대상인 교회(교회들)가 여전히 자신들을 유대교의 일부로 여기는지, 아니면 회당과 철저히 단절한 이들로(혹은 회당에서 출교당한 이들로) 여기는지를 놓고 큰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공동체는 여전히 유대교 안에 몸담은 채 유대교를 개혁하려는 활동을 펴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 자신을 유대교와 구별된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여기는가? 마태복음을 ‘얌니아 공의회’(council of Jamnia)에 제시하는 기독교의 반응으로 여기는 학자들은 완전한 단절을 주장한다. 우리가 5장에서 보았듯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지중해 해안에 있는 얌니아라는 고을에 유대교를 재건할 ‘학교’를 하나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유대교 내부의 한 분파로 여기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랍비들이 유대교가 믿는 내용과 유대교의 경계를 더 정확히 정의하는 논의를 펼치고 난 뒤, 그리스도인과 다른 그룹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리스도인은 회당에서 쫓겨났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얌니아에 보인 반응으로, 기독교가 유대교의 진정한 완성임을 변호한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꼭 얌니아에 호소하지는 않으면서도, 마태의 공동체를 유대교와 확실히 단절한 공동체로 여긴다. 이들은 특히 마태복음이 “그들의” 서기관(7:29)과 “그들의” 회당(4:23; 9:35; 10:17; 12:9; 13:54)을 언급한 말을 지적한다. 마태복음은 바리새인을 특히 혹독하게 비판한다(15:12-14; 23장).
--- 「08. 마태복음」 중에서
탄생 내러티브의 구조가 지닌 두 번째 특징은 탄생 내러티브 찬송, 곧 찬송가가 잇달아 이어진다는 것이다. 영으로 충만한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부르는 찬송이다. 이 찬송들은 구약의 시편과 비슷하며, 현대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들과 아주 흡사한 기능을 한다. ‘오클라호마!’(Oklahoma!)나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에 나오는 인물들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면서 이야기를 설명하거나 묘사하듯이, 마리아, 사가랴, 시므온, 천사 합창단도 성령에 감동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송축하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46-55). 사가랴는 구원자를 다윗 혈통에서 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1:67-79). 늙은 선지자 시므온은 이 메시아가 유대인은 물론이요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주리라고 예언한다(2:29-32).
--- 「09. 누가복음」 중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에서도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에 이어 예수가 물 위를 걸으시는 이야기가 나온다(6:16-24; 마 14:22-33; 막 6:47-51). 이 다섯 번째 표적은 모세가 물을 가로질러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유월절-출애굽 장면을 떠올려 준다(출 13-15장). 야웨가 바다 위에 당신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펼쳐 보이셨듯이, 예수도 자연에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신다. 예수는 폭풍에 흔들리는 배를 향해 걸어가셔서 이렇게 소리치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새번역). 이 “나다”(헬라어 eg? eimi, “나는 나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종종 나타나며,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자신을 묘사하실 때 “나는 나다”?스스
로 존재하시는 야웨(출 3:14)?라고 말씀하신 이야기를 떠올려 준다. 예수가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시는 것은 8:58에 가서 훨씬 더 분명하게 이루어진다.
--- 「10. 요한복음」 중에서
샌더스의 논지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자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초대한 이들에게 참회(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이다. 샌더스는 복음 전승이 말하는 ‘죄인들’은 단지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모욕한 진짜 악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이들에게 참회를 요구함이 없이 그의 나라에 자리를 거저 마련해 주었다. 샌더스가 예수와 유대교의 연속성을 거듭 주장하는 것을 고려할 때, 샌더스의 주장 중 이 부분은 특히 괴이하다. 유대교의 회복 신학에서는 참회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주장은 샌더스가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에 실상 아무런 갈등도 없었다고 주장한 것에도 어긋난다. 예수가 죄인들을 참회 없이 받아들였다면 깐깐한 바리새인들은 이를 틀림없이 증오했을 것이다
--- 「11. 진짜 예수를 찾아서」 중에서
대다수 차이점은 저자의 소소한 편집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차이점들은 더 명백한 모순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은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식사라고 밝히는데(막 14:16과 평행 본문), 요한복음은 이를 유월절 이전에 하는 보통 식사로 다루는 것 같다(요 13:2; 18:28). 학자들은 이를 통해 요한이 예수를 유월절 전야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들이 희생되었다(“유월절 주간을 준비하는 날”, 요 19:14, 31, 42). 요한복음은 예수가 분명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었다고 말하지만(요 1:29, 36), 이것이 꼭 공관복음과 모순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같은 유대인이라도 갈릴리 사람과 유대 사람, 혹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처럼 같은 집단에 속하는 이들끼리는 각기 다른 날에 유월절을 쇠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이 난제를 해결한다.
--- 「12. 복음서가 제시하는 역사의 신빙성」 중에서
누가복음 17:21을 보면, 바리새인이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묻자 예수가 이렇게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일부 사람들은 이 “너희 안에”를 “너희 마음속에”라는 뜻으로 번역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바리새인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 표현은 십중팔구 “너희 가운데”나 “너희 중에”라는 뜻으로서, 예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임재를 통해 당신의 통치를 세워 가신다.
--- 「16. 예수의 메시지」 중에서
예수가 행하신 기적이라는 문제는 우선 철학 문제요(기적이 가능한가?), 두 번째로 역사 문제다(신뢰할 만한 구체적인 기적 이야기를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는가?). 기적을 처음부터 무턱대고 배제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기적 기사는 비판적 검증을 받아도 잘 이겨 낼 것이다. 광범위한 복음서 자료들과 양식들은 기적을 폭넓게 증언하며, 이 기적들은 십중팔구 예수가 실제로 한 설교임이 틀림없는 하나님 나라 설교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
--- 「17. 예수의 기적」 중에서
일부 학자들은 이 말씀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셨을 리가 없으며, 이 말씀은 후대 교회의 대속 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아람어 배경이 들어 있다. 더구나 우리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 나라를 여는 메시아로 보셨을 뿐 아니라, 고난과 죽음도 예상하셨음을 일러 주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 속에 담긴 다른 모든 것도 예수가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의 정점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일러 준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도 자신의 죽음을 이와 같이 이해하셨다고 예상할 수 있다.
--- 「19. 예수의 죽음」 중에서
복음서가 기록해 놓은 부활 현현은 여타 종교적 환상이나 환각과 공통점이 없다. 종교적 환상이나 환각은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며, 다양한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적 환상은 보통 개인의 체험이요 주관적 체험이지, 공동체 차원의 체험은 아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이 동일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울러 우리는 무엇이 이런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어떤 보고나 기사를 보아도,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메시아를 참칭했던 다른 이들이 로마인에게 처형당했을 때, 그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지도자의 부활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가 없는데도 그가 부활했다고 떠들어 봤자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아울러 예수와 형제지간인 야고보가 예수가 부활하신 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요7:5; 막 3:21).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뵙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메시아 대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 「20. 예수의 부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