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죽었다 다시 산 곳, 곧 하늘 위 지극히 높은 곳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곳, 곧 십자가가 그의 영혼의 고향인 셈인데, 이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주님이 그 음성을 알아들으실 수 있고, 바로 이런 곳이라야 주님이 편안히 거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죄인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이다(눅 5:32).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에서 거듭난 자와 동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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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믿는 자(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잠 12:3), 뒤로 물러가 침륜(沈淪, 멸망)에 빠지지 않으며(히 10:38-39, 참고 시 55:22), 설사 일곱 번 넘어져도 회개를 통해 다시 일어난다(잠 24:16). 이에 대해 성경은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을 본다고 말씀하신다(잠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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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회개한다고 하지만,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끝장을 볼 때까지) 회개하지 않고서도 다 회개했다고 생각한다. 상당수의 사람이 죄의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할 정도로 회개하지 않고도 그렇게 믿고 있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그저 줄기까지, 가지까지, 잎사귀까지, 심지어 싹만 날 정도의 회개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상대적인 인간의 은혜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자가 삶 속에서는 전혀 은혜를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 p. 185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세례의 사역이었다. 즉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씻기는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지상명령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이었다(마 28:19-20).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세례로까지 이어지며(행 1:8), 우리로 하여금 인류 모두를 위해 받으신 세례인 십자가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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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길가의 마음을 가진 자가 구원의 확신을 조금 느꼈다고 해서, 곧바로 옥토의 마음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없다. 회개도 없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저절로 깨진 그릇이 온전한 그릇으로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몇 번 주님을 의지했다고 해서, 영원히 주님을 의지한 상태로 되는 것이 아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입으로만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십자가에 자아가 못 박힌 상태로 되지 않음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고도 믿기만 하면, 저절로 행한 상태가 되지 않음은 상식이다.
--- p. 263
이에 대해 호크마는 회개가 믿음과 구별될 수 있고 또 마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칼빈도 믿음의 결과는 회개라고 말하면서, 회개와 믿음은 굳게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빙크는 바울의 회개의 개념이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님을 따르며,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본다.
--- p. 274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이 진정 사랑인가?
버리는 것이 왜 사랑인가?
미움이 아닌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에 버려야만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그 버림은 하나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대신 건짐을 받도록 한 버림이다. 그래서 사랑이다. 이른바 “사랑의 버림”인 셈이다.
--- p. 353
그러므로 우리도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마 5:39). 오히려 원수의 악에 대하여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저항해야 한다. 또 원수에 대하여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미워해야 한다. 악인에게 저항하지 않으면 겉으로 볼 때 악에 굴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악에 저항한 것이 된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 상대방의 미움을 없애는 힘이 있다(삼상 30:26-31). 오른뺨을 맞을 때 저항하지 않고 왼뺨도 대주면, 빨갛게 핀 숯을 원수의 머리에 놓는 격이 되어(잠 25:21-22), 그 원수는 자기 머리 위의 그 뜨거운 사랑을 보고 양심에 찔려 마음이 녹아지게 된다.
--- p. 379
기독교의 참된 자기부인은 마치 다 탄 숯과 같다. 다 탄 숯을 보라! 새까만 숯은 남들이 보기에 더럽게 보이지만, 놀랍게도 다시 불을 지필 때는 아무 연기도 내지 않는다.
즉 “믿음”이 주님과 함께 세상적인 자아가 중심적으로 죽은 것이라면, “자기부인”은 한 번 중심적으로 죽은 세상적인 자아가 또다시 기지개를 켜지 못하도록 죽이고 또 죽임으로 계속 다 탄 숯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 p. 399
이처럼 사랑과 공의는 각각 어느 한쪽도 잃어서는 안 되는 관계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사랑이 죽어버리면, 공의도 더불어 죽어버린다. 즉 생명과를 먹은 자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선악과를 먹은 자, 곧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하지도 않고) 바로 옆에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을 얻을 것 같으나 오히려 더 죽어버린다. 공의의 기준을 어긴 가운데에서 생명과를 먹으면, 생명과를 더럽힌 것이 되어 그 결과 더 큰 심판에 이르는 것이다. 즉 생명과는 오직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 먹어야 비로소 유효하다.
--- p. 424
착한 사람들에게 법(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참고 딤전 1:9)
오히려 이들에게는 법이 있기에 더 유익을 보게 된다. 법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악하게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로를 좋은 관계로 지키기 위한 법을 왜 만들어 놨느냐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또 법을 만든 것을 보니, 분명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이웃이 나를 악하게 대하면 벌을 받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나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남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내 마음대로 살게끔 그 법을 없애달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 p. 427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시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신자의 마음에 예수님만큼 공의로운 분이 없다. 믿는 자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어주심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더 의롭고 공평하다. 긍휼이 심판을 이김으로, 신자의 마음에 공의가 더욱 살아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약 2:13). 진정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불공평하고 불의하게 보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영원히 공평하고 공의롭게 되었다.
--- p. 436
첫째, 이 “중심”은 마치 나무 “뿌리”와 같아서, 그 뿌리만 튼튼하면 비록 가지나 잎사귀나 열매가 잘려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듯이(사 6:13), ‘속마음’만 중심을 딱 잡고 있으면, 비록 ‘겉마음’이 흔들리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가령 사탄의 유혹의 씨가 마음에 뿌려졌더라도, 내 중심으로 허용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중심이 형성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때는 믿음으로 (그 유혹을) 고사시키면 된다.
--- p. 452
셋째, 우리의 마음밭에 여러 종류의 마음, 곧 길가, 돌짝밭, 가시떨기, 옥토의 마음 등이 섞였더라도, ‘중심’이 옥토의 마음이라면, 잔챙이 마음들이 있더라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여러 종류의 마음이 각각 “중심적으로” 섞였을 때는 가장 낮은 마음이 그 중심이다. 가령 마음의 중심이 가시떨기 중심도 있고, 옥토의 중심도 있었을 때는 이때의 중심은 가시떨기 마음이다.
생각해 보라! 1m 높이의 항아리가 있었을 때, 30㎝ 지점에서 구멍이 났다면 물이 어디까지 채워지겠는가?
--- p. 453
예수님을 믿어도 왜 죄가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가?
그것은 믿은 이후의 죄에 대하여, 아직 그 죄를 죽도록 미워할 정도로 회개하지 않아서가 아닌가?
다 회개했다고 생각해도 응답이 없는 것은 나아만 장군이 그러했듯이, 일곱 번 다시 씻어야 하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왕하 5:14).
믿다가 실족하면 자기 안에 허용한 질 나쁜 죄가 주님의 사랑을 바로 인식하는 것을 막는다. 항상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빌 바를 간구하시지만(롬 8:26), 그의 양심이 무뎌져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 p. 467
넷째, 온유는 참사랑의 “완충제”이다. 어린이가 뛰어놀다가 모나고 딱딱한 표면에 넘어지면 크게 다치기 마련이지만, 부드럽고 푹신푹신하며 둥글둥글한 표면에 넘어지면 별로 다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온유는 질퍽한 진흙(옥토)과 같아서, 자기에게 오는 악에 대한 충격을 받쳐 줄 만한 저항력이 충분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자기 마음에 떨어져도 사뿐히 안착시키며, 설사 이웃이 자기에게 악을 행해도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흡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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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앙공동체전체의 입장은 무시하고, 남이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나나 내 가족이나 내 교회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만 중요하게 여기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인은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한다(롬 15:2; 고전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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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미꾸라지에 소금을 넣으면 견디기 힘들어 막 몸부림을 치듯이, 또 배추에 소금을 뿌려 절이면 배춧속에 소금의 짠맛이 깊이 배이듯이, 지옥은 불로 소금 치듯함을 받아(aJlisqhvsetai, 할리스쎄세타이, 소금 치는 것을 당해)) 너무 뜨겁고 고통스러워 도저히 참기 힘든 곳이며, 또 불로 절여지듯 그 맹렬한 심판의 불이 불구덩이(풀무불)에(마 13:42) 던져진 자들의 몸에 깊이 배이게 되어 고통이 가중되므로 통곡하며 몸부림치게 되는 곳이다(막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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