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퐅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비다. 일 년 중 절반이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우기라 그렇다. 보통 10월 말부터 서서히 비 오는 날이 많아져서 이듬해 5월 초순까지 좀 지겹다 싶게 내린다(일주일에 칠 일). 젖는 것이 정말 싫다면 그때는 피하는 게 좋다. 한데 ‘비의 도시’를 비가 안 오는 계절에 여행하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 p. 17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 결국 아내가 나에 대한 푸념을 안줏거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는 내가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만날 방구석에서 ‘이베이ebay’하고만 논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참 조용히 듣고 계시던 황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눈썹과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우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배희’가 누구니?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이야?” --- p. 191
아내는 이곳에 오기 전,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란 책을 썼다. 좋은 책이다. 어쩌면 아내의 여러 책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책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는 날마다 하나씩 버리는 아내에게 정말이지 면목이 없다. 나는 몇 해 전 《콜렉터》라는 책을 냈다. 수집에 관한 이야기다. 우린 그렇게 다르다. 한 사람은 엄청나게 모아대고 한 사람은 엄청나게 미니멀하게 살고 싶어한다. 각자가 그것에 대해 책도 썼다. 도저히 현실적인 접점이 없어서 그것 때문에 종종 언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건 이곳 퐅랜에서도 여전하다. 아마 영원히 우리는 서로에게 답이 없을 거다. 하지만 어떤 문제들은 그 문제 자체가 존재 가치일 수도 있다. 끝없는 생성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처럼. --- p. 196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다. 그 도시에 갔으면 당연히 ‘거긴’ 들렸겠지? 하고 누군가 물어볼 만한 곳, 하지만 가보지 않은 곳 말이다. 도시의 상징처럼 유명한 곳이라 누구나 가봤으리라 생각하지만,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흥미는 그다지 끌지 못하는 ‘그런’ 곳. 이를테면 서울에선 남산타워 같은 곳이 그렇다. 서울을 홍보하는 이미지엔 언제나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실상은 거대한 텔레비전 안테나일 뿐이다. 애써 올라가도 그저 서울의 지붕들 외에 과연 볼만한 게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퐅랜에도 그런 데가 꽤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퐅랜 자체가 그렇다. 북미 서해안에서 ‘힙’하게 떠오른 도시인데 막상 이곳에 도착하면 그다지 꼭 봐야 한다거나 빠뜨리지 말고 갈 만한 곳이 거의 없다. 이를테면 이곳 관광홍보 이미지에 자주 나오는 케이블카는 어떨까. 그건 사실 산 위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는 교통수단이다. 병원 건물 7층으로 곧장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아내와 딸만 가보았다). --- p. 263
한번은 복고풍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이베이에서 샀는데 받아보니 화면에서 본 것과 영 달랐다. 옛날 이미지를 싸구려 프린트로 재연한 셔츠라 상태가 실망스러웠다. 운동할 때나 입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얼마 전 달리기 할 때 입고 나갔다. 한참을 달리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걸으며 가슴팍을 내려다봤는데 가슴에 있는 그림이 조금 이상했다. 티셔츠의 프린트가 땀에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