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마음의 병은 대부분 그들이 맺는 삶의 관계들에서 생 긴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왜곡된 삶의 관계들이 구조화되어 병든 사회가 아픈 마음을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힐링’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해결책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무너진 마음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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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핵심 원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찾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소를 찾아가기는 했지 만 각각 자기 소견대로 살아갈 뿐이었고, 기도한다고 했지만 그냥 제의를 따르는 것으로 그쳤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남이 하는 기도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에 그친다. 자기 목소리로 기도한다고 해도 진실한 마음이 그 속에 담기지 않는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종교적 형식들이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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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성소에서만큼은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성소인 내면에서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마음속에 등불로 켜 놓으라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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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를 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 비록 ‘주여, 주여’ 하며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해도, 자신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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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으로 삼으시고, 인간 왕의 매개 없이 하나님을 직접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나라로 세우셨다. 거대한 왕궁을 소유한 인간 왕이 다스리는 왕정 국가가 아니라, 하늘 왕을 모신 소박한 이동용 성전이 있는 신정 국가였던 것이다. 그 나라는 절대권력을 가지고 정점에서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인간 왕에게 백성들이 복종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제한적 권위만 행사하는 존재였고,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다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순종하는 그런 나라였다. 그 나라는 인간 왕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임의로 다스리고 또 전쟁터로 몰아넣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그 나라는 오직 하늘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서 다스리고, 백성이나 지도자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자유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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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상시 이런저런 기대를 품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그중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듣는 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제목이다. 듣는 마음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우선적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가정을, 직업 현장을,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스림을 받아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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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이라는 골리앗과 마주하고 있다. 어떻게 맞서 이길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선하게, 분노가 아닌 화평의 방식으로, 교만 이 아닌 겸손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악한 세상이라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다윗과 같은 사람을 찾으신다. 중심이 바른 사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골리앗과 같은 현실을 넘어뜨리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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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왕위를 평화롭게 이양하고 다윗을 후원하는 인물로 조용히 살았다면, 백성들은 그를 왕위에 오를 때보다 더 존경했을 것이다. 그의 뒷모습에서 단풍 빛깔 같은 아름다움을, 일몰의 장엄한 빛깔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을이 왔는데도 여전히 여름철 잎사귀를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다가, 그만 그의 인생 나무가 통째로 얼어붙고 말았던 것이다.
--- p. 154
가족을 찾아온 것도, 전리품을 얻은 것도, 오늘의 이 기쁨을 안은 것도 모두 자기들의 공로라고 생각하며 권리를 독점하겠다고 주장하려는 이들에게, 다윗은 이 모든 것은 사실상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가족을 찾게 된 것은 다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요, 전리품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니, 전쟁에 나간 사람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이나 몫이 같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일 뿐이며, 우리는 오직 은혜로 산다는 진리를 다시 일깨운 것이다.
--- p. 209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그들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상황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고, 폭력과 속임수와 조작으로 역사를 가로막기도 하나, 이런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사헬과 아브넬과 요압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 통일 왕국은 오고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하고, 비록 삶의 어둠이 깊어져 간다고 해도, 마침내 하나님께서 만드신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믿음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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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이야기는 자기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잊고 살고 그래서 남을 용서하는 데 인색한 것이,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고통을 주는 죄임을 알려 준다. 이런 죄는 경건한 다윗도 잘 극복 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런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윗에게서도 드러났지만, 사랑이 아닌 그 어떤 방식도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결국 실패로 끝날 뿐이다. 그렇게는 남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과 남을 다 해치는 것이다. 이것을 다윗은 두 아들을 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때늦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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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가 있다.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들판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병들어 낙오된 양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건강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병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들로 나간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보면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래도 목자는 들판으로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갔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한 사람을 백 명 중의 하나라는 숫자로 여기지 않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격체로 여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여기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쳐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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