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선과 악,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인식하는 이분법의 뿌리는 송시열과 노론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 이후 ‘사문난적斯文亂賊’(주자학을 문란하게 한 도적)이라는 말이 생겨 주류 학문은 나와 다른 타인을 억압하고 유폐하는 폭력적 도그마로 변질했다. 개방성과 역동성, 운동성을 잃고 닫힌 해석에 안주하는 철학과 지식은 필연적으로 권력의 효과적 통제 수단으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 안에 조선 후기 역사가 있고, 그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한다. 왜 그럴까? 노론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을 향유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일전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다.” “조선 국민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일이 될 뿐이다.” 이것이 대표적 노론 명가 출신이자 당수인 이완용이 한국 최초 근대 소설로 추앙받는 [혈의 누]의 저자이자 비서인 이인직을 통해 일제 통감부에 전한 노론 당론이다. 중국에 사대하던 것을 일본으로 바꾸자는 것이 노론의 입장이요, 사상이자 이데올로기다. 민초를 중심으로 시대가치를 추구하는 프레임이 노론에게는 없다. --- pp.5~6 「저자 서문」중에서
“자식이 미쳤다고 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죽였다는 것은 참 납득하기 어렵다. 당연히 의혹이 뒤따를 만하다. 그런데 [한중록]을 읽어보면 그 경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 영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이런 것들로 인해 정신 질환이 깊어졌는데, 죽기 직전에는 아버지를 죽인다는 등 별별 망측한 언행을 다 하다가 그 사실이 영조에게 발각되어 역모 혐의를 받아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런 혜경궁의 논리를 혜경궁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보았다. -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 [역사비평] 2011년 봄호, 330~331쪽”
이것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하는 정병설의 핵심 견해다. 이덕일 소장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사료 비판한다. 사석이나 강연에서 “[한중록]에는 사실도 있고, 과장도 있고, 왜곡도 있고, 거짓말도 있다”고 말한다. 어느 것이 사실이고 과장·왜곡·거짓말인지 밝히는 것이 바로 학자가 할 일이다. 반면 [한중록]은 진실을 기록한 글이니 사료 비판 없이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정병설 주장의 요체다.
[한중록]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많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할 때부터 비판이 있었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해자의 기록이다. 정병설은 중요한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럴까? “[한중록]을 읽어보면 그 경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말에 그 답이 있다. ‘앞으로 모든 살인 사건의 피의자는 그 경위만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무죄다.’ 이것이 정병설의 논리다. --- pp.39~40 「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중에서
[사도세자의 고백] 발간 이후 [역사에게 길을 묻다]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이덕일 소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사도세자에 관한 기본 사료는 크게 세 가지다. 사관들이 편찬한 [영조실록]과 정조가 편찬한 [어제장헌대왕지문] 그리고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이다. 정조의 [어제장헌대왕지문]이 사도세자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라면, [영조실록]은 사도세자에 대한 건조한 기록이다. 이는 세자의 아들인 정조 재위 시에 편찬되었으나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이 다수 편수관으로 참여한 데서 나온 결과다.
문제는 [한중록]이다. 남편 세자가 뒤주 속에서 갈증과 기아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나약한 여인의 피맺힌 기록이란 선입견이 일반인들은 물론 일부 전문가들까지 사료 비판을 생략한 채 사실로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28세에 동갑인 세자를 잃은 그녀가 젊은 과부를 뜻하는 청상과부로서 [한중록]을 썼다고 지레짐작했던 것도 [한중록]을 오독하게 만든 원인의 하나였다. (……) 그녀는 20대의 청상과부로서 [한중록]을 쓴 것이 아니라 일생의 대부분을 권력투쟁의 현장에서 보낸 70대의 노회한 정객으로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한중록]을 쓴 것이었다. --- pp.76~77 「이덕일, [역사에게 길을 묻다]」중에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한중록]을 보는 이와 같은 관점과 맥락으로 이덕일 소장은 [사도세자의 고백]을 저술했다. 이에 대해 정병설은 [사도세자의 고백]이 제대로 된 근거와 논지를 갖추지 못해 역사서도, 소설도 못 된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 pp.60~61 「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중에서
김용섭 선생의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에 담긴 내용이다.
“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우선은 기성의 일제하 세대 역사학자들에게 일임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년, 35쪽”
이렇게 해방 후 역사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일본인 학자, 즉 식민사학자에게 역사학을 배운 이른바 실증주의 학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통사를 편찬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해방과 동시에 해체됐지만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는 그대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와 같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현재 주류 사학계의 뿌리 깊은 역사 전쟁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 pp.273~274 「10장 뿌리 깊은 역사 전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