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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척할래

태연한 척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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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08쪽 | 328g | 135*200*30mm
ISBN13 9788937434914
ISBN10 893743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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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신장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때와 똑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두려움이 내 피와 뒤섞여 심장에 도달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엄마는 서른일곱 살이었고 이름은 안나였다. 엄마는 이 년 뒤 세상을 떠났다.--- p.11

삶이 계속 앞으로 나간다고 말한 사람은 바보다. 그렇지 않다. 삶은 멈춰 서 있다. 시간은 앞으로 나가지만 삶은 자신의 내부에서 수도 없이 멈춰 서서 당신이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당신이 멈춘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 여기 맨 끝줄에 앉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저항할 것이다. 나는 삶이 나의 의지 없이 어느 곳으로도 끌려가지 않기를 원한다.--- p.27

체칠리아가 슬며시 웃더니 치마를 가져가며 안 된다고, 내가 입으면 치마가 늘어난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그 애 친구가 비곗덩어리 쳐다보듯이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체칠리아가 말랐고 내가 뚱뚱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린 친구인데 뚱뚱하고 마른 게 왜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 몸이 우정과 무슨 관계가 있나?--- p.28~29

나는 쉬지 않고 물을 가로지를 때처럼 호흡에 집중하고 팔을 저을 때마다 만들어지는 파란 물보라에 집중한다. 갑자기 수영장 벽이 사라지는 상상을 하면 즐겁다. 그렇게 되면 나는 드디어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고 다시 물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그렇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p.30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 어디에선가 혼자 있을 수 있을 텐데. 내 인생은 멈춰 선 채로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p.52

엄마는 나하고 할머니가 많이 닮았다고 말하곤 했지. 쀼루퉁한 백작 부인들이라고. 엄마가 퇴근했을 때 따로따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 할머니와 나를 보면 그렇게 불렀잖아. 그늘
을 지우고 침묵을 깬 사람은 늘 엄마였어. 현관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들어오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 엄마는 가방을 내려놓고 문을 다 열고 사방에 엄마의 목소리를퍼뜨렸지. 중단된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 그런 다음 구두를 벗고, 엄마와 우리 생각을 한데 모으려는 듯이 소파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봤지. 그때 할머니와 나는 엄마의 눈동자 속에 함께 들어 있었어. 그러면 할머니와 나는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알아차리곤 했지.--- p.54~55

만일 엄마 같은 성격의 또래 여자 친구를 만났다면 그 애와 내가 절친한 친구가 되었을 거야. 확신해. 그리고 엄마에게는 그렇게 못 했지만 그 애에게는 훨씬 너그러웠을걸. 난 엄마의 쾌활한 성격이 좋았어. 가끔 그 쾌활함이 어리석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척하며 거부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나의 분노는 깊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듯했지. 지금 엄마의 쾌활함이 너무나 그리워,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친구처럼.--- p.63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내 몸을 감싸고 나를 보호해 주는 안개와 비로 가득한 도시의 추위를 사랑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더위와 여름과 샌들에 대한 건강한 사랑을 과시하
는 게 균형 있는 사람의 상징이다. 만약 그 반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날 우울증 환자로 취급할 것이다.--- p.70

제로 더하기 제로가 얼마야? 난 오늘 밤 너보다 더 제로야.--- p.86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런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어떤 물건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어떤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것. 우리는 기억의 무게와 함께 과거로 가지 않기 위해 과거를 가두어 버린다.--- p.103

엄마가 토요일 밤 화장을 하고 혼자 춤을 추러 가면 온갖 나쁜 생각을 했다. 엄마는 경솔한 사람이어서 말썽만 일으키고 절대 성장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들.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난 괴로워하는 엄마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 실의에 빠졌고, 그때까지 나를 보호해 주던 작은 집을 누군가가 입으로 세게 불어 그 집이 얼마나 허약한지 알려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가 강해져서 위기에 대처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꿋꿋하게 서 있는 여자가 되길 바랐다. 우리 반 친구들의 엄마들처럼 배려심 있고 차분하게 가정생활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완성되고 완벽한 엄마를 원했다. 비록 본모습은 그렇지 않더라도 믿음직한 엄마를 원했다. 위선자나 이기주의자라도 상관없었다.--- p.119

제로랜드는 내가 몸을 숨겼던 공간이야.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고 영원히 그러리라는 걸 알려야 했을 때 내가 상륙했던 곳이야. 거기 네가 있었어. 넌 텅 빈 왕국의 왕이었지. 제로랜드가 그립지 않니?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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