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시절 3월의 술자리, 국문과 선배들은 스스로를 ‘굶는 과’라고 자조하며 술을 마셨다. 일 년 뒤 우리도 그들을 따라 똑같이 패배감 섞인 웃음을 지으며 갓 들어온 신입생들을 안쓰러워했다. 아마 그들 역시 그들의 후배들에게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건지 알 수 없는 말, ‘굶는 과’를 물려주었을 거고 여전히 학교 앞 술집에서는 그런 애처로운 웃음들을 마주할 수 있겠지. 그런데 학부를 졸업한 지 8년 정도가 지난 지금 주위를 둘러보니 국문과 선배, 동기, 후배들 모두 용케도 어떻게든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중생대부터 끈질기게 살아남아 전 세계의 모든 어두침침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바퀴벌레들처럼 나의 친구들은 언론이건 금융이건 치킨이건 아니면 나 같은 딴따라건, 이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로 퍼져나가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문과를 우대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고 ‘전공불문’만을 찾아 원서를 내야 한다며 슬퍼했던 내 친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공불문의 영역에서 멋지게 살아남은 내 친구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한가득 들어있다. ‘어디든지 가기 어렵다’는 말은 사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 책, 『문과생존원정대』를 건네고 싶다.
강백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수준 높은 만화와 절절한 이야기를 통해 청춘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거리낌 없이 칭찬하고 추천해야 하는데, 들여다보노라니 우선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문과 vs 이과’의 오랜 괴상한(그래서 허물어져야 할) 이분법이 기본전제인 데다가, ‘어쩌다, 살길 찾은’이라니? 젊디젊은 그들이 ‘생존’부터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아픕니다. ‘문송하다’는 스스로의 패배주의도 깔려 있는 듯하여,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이 책의 서사는 나 같이 대학 밥을 먹는 독자에게는 소위 ‘이과’나 ‘당장 돈 되는’ 학과 위주로 된 오늘날의 대학교육과 그런 일을 강요한 체제를 바꿀 것과, 또 그런 사회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거나 못하는 대학 ‘문과’ 교육에 대대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그런데 마치 사랑이나 우정, 정의나 인간 같은 그러하듯 대학과 인문학 교육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사랑이나 정의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날의 대학이, 아니 어쩌면 우리네 삶 전체가 기업과 자본에 의해 식민화되고, 마치 생의 매 순간이 성과와 경쟁에 바쳐져야 하는 거로 이해되는 현실 때문에 그리된 거겠지만,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생과 세계에 대해 정말 필요한 것을 배웁니다. 대학이 아니라면 삶, 생명, 성장, 사랑, 죽음, 사회, 국가, 정의 같은 것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는 매우 드뭅니다. ‘이공계’라 이름 붙여진 어떤 학과 출신들이 ‘취업’이 잘 되는 이유는 대체로 단순합니다. 기업이 그들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간단합니다. 그들을 뽑아야 당장 써야 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이과’였습니다.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가 때려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살고 싶은 삶을 찾아 재수해서 국문과를 갔습니다. 나이가 들며 문제는 어떤 과가 아니라 더 큰 인문·사회과학과 예술적 사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스무 살 무렵의 전과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멋진 사람들과 지식을 국문과와 인문대에서 만났습니다.
사실 인간은 ‘생 전체’를 다 짐작할 수도, 시류를 다 읽을 수도 없습니다. 인생은 꽤 길고 깊고, 그에 비해 한국 대학이나 기업은 사실 잔망스러운 것입니다. 초조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생존’은 진리의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진리 전체는 아닙니다.
누구의 선택도 틀리지 않았고, 설사 일시적으로 틀렸거나 후회한다 해도, 다시 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멋진 ‘큰 그림’인 듯합니다. 모든 ‘문과생’에게 응원과 격려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천정환(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