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 봄비 내리는 날 /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 / 발문|이재현 / 작가의 말 / 초판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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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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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집 없는 사람들의 슬픔과 희망
1988년 발표한 등단작 「성장」은 열여덟살부터 문래동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도 알려져 있다. 주인공 창진 일가의 절대적 빈곤이 소상히 그려진 이 작품은 아버지 없이 동생과 어머니를 챙겨야 하는 창진이 기계공장에서 착취당하다 재개발로 인해 쫓겨 이사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마지막 대목이 엄연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창진이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을 봤기 때문이리라. 눈은 누구에게나 곱고 깨끗하다. 가난한 자에게나 부유한 자에게나 눈은 똑같이 곱고 깨끗하다. 세상 모든 일들은 이 눈 같아야 한다. (…) 창진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모든 것은 언제나 시작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눈발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아! 함박눈이다. (「성장」 142~43면) 창진은 아버지의 무능이 결코 아버지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처음으로 “조직된 힘”에 대해 생각한다. “강요당한 억압의 벽”(143면)을 부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는 현실을 되새기며 눈으로 뒤덮인 천지의 풍경을 웃음으로 바라본다. 미약하게나마 품은 이 희망의 불씨는 「봄비 내리는 날」에서 처절한 분노의 힘이 되어 돌아온다.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었지만 아파트에 입주할 돈 백만원이 없어 입주권을 팔고 또다시 변두리로 밀려나야 했던 집 없는 이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지금도 우리 교육현장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만석과 아내 영란이 삼백만원에 판 입주권이 투기꾼들로 인해 프리미엄이 붙어 천만원에도 거래된다는 대목은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짐을 트럭에 싣고 가짜 입주를 위해 검사원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은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풍경이겠지만 “셋방살이 못 살겠다, 주택문제 해결하라!”(212면) 하고 외치는 소설 속 구호는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프레스기에 팔이 잘린 동료를 위해 돈을 마련하려 해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구걸밖에 없다며 동료가 자살하자 절망하는 만석. 그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대목은 지금도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 (…)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해 움직이고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들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는가. 우리들이 날마다 꾸는 꿈은 무엇이며 그 꿈은 언제 우리들의 여위고 상처 입은 가슴을 끌어안을 것인가. 아니, 우리들은 언제까지 당하고 살아야 하며 언제까지 가진 자들을 위해 피를 빨려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목숨을 부지하고 이어나가며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봄비 내리는 날」 233면) 길 위의 삶들을 한명 한명 본격적으로 그려낸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은 무엇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슬픔을 잘 그려낸 이 작품은 공장에서 착실히 일한 끝에 반장이 된 덕배, 늘그막에 함께 살게 된 황영감과 남원댁,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생하며 살아가는 복길이네, 무당 보라네, 아이가 ‘삼촌’이라 부르는 남자와 함께 사는 현주네 등 힘없고 가진 것 없는 개개인의 삶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희망은 언제나 계속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눈을 맞는 장면으로 끝나는 「성장」의 계절적 배경은 겨울이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가 내리며 끝을 맺는「봄비 내리는 날」의 배경은 봄이며 마지막에 놓인 작품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끝」의 배경은 여름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시작”이라는 「성장」 속 창진의 말이 떠오르는 이 배치는 이 책 한권에도 겨울이 끝나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세상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 소설집에는 등장하지 않는 계절, 마침내 결실을 맺고 마는 가을은 이제 이 책을 덮는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