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시작되었을 때 예배 장소에서 십자가를 보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령 최근에 어떤 교회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전기의자나 단두대 같은 이미지가 큰 그림으로 걸려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두 세기까지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십자가를 보았을 때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굴욕,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던 어떤 막강한 제국의 힘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관해서는 크게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 통상 노예와 반역자를 처형하는 데 동원된 방식으로 누군가가 죽임당한 이 일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사건건 로마제국과 부딪치자, 그 제국이 막강한 힘으로 짓밟아버린 누군가로 인해 자기 삶이 바뀌었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 p. 18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초월적인 자유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행동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반응은 우리가 하는 일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자기 성품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함정에 빠뜨리거나 속임수를 쓰거나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원하는 것을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기 원하시면, 그것이 당신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분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유로우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보복 행동의 악순환에 말려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십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하겠다고 하시면 그대로 행하십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pp. 21~22
순종은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고 지시받은 것을 서둘러 수행하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순종이란 하나님께 조화롭게 반응하여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통해 세상에 나타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 가운데 하는 행동은 그분의 행하심을 보여줍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낌없는 사랑이 드러나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되비치는 것을 즐겨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완벽한 선물, 즉 하나님이 정말로 좋아하실 선물은 하나님, 곧 자기 자신의 더없이 후한 사랑이 그분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 p. 49
십자가에 못 박힘에 대한 초기 그림들은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가 분명 많습니다. 초기의 묘사들은 인간으로서 당한 순전한 고통은 별로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진행 중이었던 일을 부활의 관점에서 본 사람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대략 10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십자가 못 박힘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접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회피한 것이라거나 고통스러운 사실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어떤 모습일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승리자요 자유자로 묘사한 일은 단순히 경건한 비유 정도가 아니라, 고정관념을 박살 내는 막강한 개념이었습니다.
--- pp. 66~67
부활을 믿는 것은 새 시대가 열렸고, 새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적 출발점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말은 우리가 이제 말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호 작용,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전 세계와 맺으시는 상호 작용에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단계에 진입했음을 뜻합니다. (…)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세상의 끝은, …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에서 어떤 마지막 단계를 도입하심을 뜻했습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를 가져오셨지만, 이 새 시대는 아직도 역사의 제약을 받고 땅에 속해 있었습니다. 새 시대는 영원을 향해 열렸지만, 본질적으로는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의 대전환을 상징했습니다.
--- pp. 84~85
예수께서 주님이시며, 인간의 모든 이야기가 그분에게 수렴되기에 … 우리의 인간성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인간성을 방해하는 저 모든 것들, 곧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비인간화하고자 고안해온, 그 모든 방식들(미묘하든 드러내든)에 저항해야 함을 뜻합니다. (…)
부활 신앙은 우리가 주변 환경을 어떻게 보는가와 의미심장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리적 환경을 크게 염려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언급하고 표현해야 할 좋은 소식이 있는데, 곧 이 세상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 전에 하나님의 문제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피조세계 전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pp. 110, 122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현재 신분, 우리가 현재 하는 일에서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이,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것은 지금, 거기에서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힘으로 매 순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새 출발은 우리의 현재와 과거의 실제 모습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며, 갈 방향을 안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p.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