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나는 죽어 가고 있습니다. 약 달이는 창가로 불어온 봄바람이 위로의 말 속삭이지만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마자 구름을 밝고 하늘로 오르는 혼령과 피 토하며 쓰러지는 푸른 이리 떼가 보여요. --- p.11
이 글에 등장할 사람들은 대부분 보황(輔荒, 상여 위에 씌우는 비단)에 덮여 구원(九原, 저승)으로 갔지요. 살아남은 이들도 이제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내가 흘린 눈물이랑(눈물이 흘러내린 자리) 보여 줄 수 없어요. 이 글은 단 한 사람에게 바치는 자줏빛 꽃향유 다발에 가깝습니다. --- p.19
내가 왜 내 삶을 조롱하는 이들에게 나 자신을 변명하여야 한단 말인가요. 그들이 나를 세 치 혀로 놀리고 희롱한다면 나 역시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어 주면 그만이지요. --- p.116
내게는 그저 스쳐 지나간 만남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고, 내게는 매우 소중한 순간들이 무시당하기도 하지요. 꽃못에 들어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동학들과 어울려 학문을 논한 일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서, 지족선사와의 스쳐 지나간 만남은 황 모의 천성을 비난하는 예화로 쓰이니까요. 황 모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남정네를 유혹하는 기생에 불과했다고 보고픈 사와 대부들의 바람을 모르지 않지만,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비난받을 수는 없습니다.
일생의 스승이었던 화담 서경덕의 임종을 지킨 황진이는 스승의 유언을 지키고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여 글로 옮기기 시작한다. 황진이 그녀 역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기에 이제야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이야기한다. 같은 문하생이었던 허태휘의 앞으로 띄우는 황진이의 편지에는 일평생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던 기생 황진이가 아닌 시인 황진이의 삶이 자리한다. 출생부터 노년까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황진이의 일생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했다. 그 멸시의 시선을 꿋꿋하게 견뎌 낸 일류 시인 황진이는 이제 분노도 회한도 없이 담담히 자신의 삶을 유려한 문장에 실어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