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제의했던 신조는 거부되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자신의 교회에서 사용하던 세례 신조를 제시했는데 이 신조의 수정판이 결국 공의회를 통해 채택되었다. 아들은 “참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하나님이요,” “태어나셨으나 창조되시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고,” “그가 아니 계신 적이 없었다”라는 내용이 골자였다. 또한 로고스란 용어를 아들로 대체했다.
--- p. 92
성직 매매로 인한 타락으로 수도원의 이상은 약화되었고 영적 침체가 가시화되었다. 수도사들은 서약에 따라 부를 소유할 수는 없었으나, 사용할 수는 있었다. 수도사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는 없었으나, 수도원은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었다.
--- p. 154.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행복이라고 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는 모두 이 목표를 향하도록 되어야 한다. 분별, 정의, 용기, 그리고 절제 등의 자연적 미덕들은 그리스도인들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존재하지만, 이방 철학자들이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할 때 인간이 자신을 아는 축복에만 그치지만,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인간을 아는 축복과 더불어 하나님을 아는 축복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이방 철학의 미덕과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결합시켰다.
--- p. 201.
14세기 영국의 노르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3~1413)도 빼놓을 수 없는 여성 신비주의자였다. 줄리안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20세기 후반에 그녀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들』과 『나열들』(Showings)에서 그녀는 낙관주의적 신비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그녀는 세상에 만연한 악과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으나, 진노가 아닌 하나님의 연민을 강조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비전들을 매우 생생하게 감각적으로 묘사했다. 신비주의에 있어서 그녀의 주된 공헌은 예수를 우리의 ‘어머니’로 묘사하는 등, 하나님을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묘사한 점이다.
--- p. 230.
칼뱅에게 교회는 가시적이면서 동시에 비가시적이다.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가시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소속하지 않으면 누구도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고 그 사람은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참된 교회에 소속될 수 없다. 1세대 개혁자였던 루터가 칭의 교리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면, 칼뱅은 부처와 함께 2세대 개혁자로서 개신교 교회론의 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하겠다. 루터의 근본적인 질문이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였다면 칼뱅은 “어디에서 참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가?”였다고 하겠다.
--- p. 300.
트렌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논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로마 교회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재천명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은 가톨릭주의 내부에 새로운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큰 도전 없이 지켜졌다. 그런데, 트렌트 공의회가 교리와 관습의 현상 유지를 택함으로써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구조적 개혁의 움직임들은 중단되고 말았다.
--- pp. 353-354.
얀센주의는 절대 은총과 예정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종했다. 얀센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죄는 역설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보다 펠라기우스주의를 선호했음을 의미했다. 17세기 은총과 인간의 공로에 관한 논쟁은 얀센주의와 예수회의 논쟁이었다. 1668년 양자 사이에 일시적인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잠시 루이 14세는 포트로얄 수도원을 파괴하고 얀센주의는 교황청으로부터 거듭 정죄되었다.
--- p. 413.
예수회는 타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국지적이고, 비관용적이며, 과거 지향적이었던 전통적인 수도원들에 비해 범세계적이고, 관용적이고, 미래 지향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개신교에 자행한 유례없는 잔인함과 호전적 자세와 함께 평가한다면 아이러니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세기에서 예수회는 보수적인 교황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 이어 갔다.
--- pp. 415-416.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1682~1725)는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서방 곳곳을 여행했으며, 서방을 동경했고 러시아·비잔틴 문명을 서방화시키려는 작업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을 동방의 고립으로부터 탈피시켜 서구에 진입시켰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합리주의와 이신론 같은 계몽주의 사상을 도입했다. 피터의 서방 동경은 상상 이상으로 컸었다. 그는 통치 초기부터 러시아를 서방 국가로 바꿀 의도까지 내비칠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를 “문명을 흉내 내는 침팬지”로 조롱했다.
--- p. 424.
대한민국 부산에서 제10차 총회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로 모였다. 한반도 평화 문제와 통일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교회의 선교와 일치, 그리고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해 논의했다.
--- p.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