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컴퓨터 프로그램이 좌절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또는 빅데이터에 좌절이 생겼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혹은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이세돌과 대국을 치루면서 좌절의 순간을 맛보았다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 인공지능은 앞으로 결코 좌절이라는 것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좌절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그저 오류를 최소화할 뿐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좌절을 맛봅니다.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사고 능력이 떨어져서 좌절을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사고만 할 뿐,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메타인지’(스스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학습 과정을 조절할 줄 아는 지능과 관련된 인식)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인공지능은 자아自我가 없으며, 인간은 자아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존재만이 좌절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교육자로서, 더 나아가 초등교육 전문가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인공지능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들을 굳이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이지요. ---「좌절은 직관의 문이다」19~20쪽
학부모의 욕망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내 자녀를 더 나은 교육 환경에 노출시키고 싶고, 아이가 보다 반듯한 어른으로 자라서 후에 주위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오르기를 바라는 욕망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바람’이라고 해야겠지요. 지극히 순수하고 당연한 바람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추구할 때, 안정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지나친 방어기제가 발동한다는 것입니다. (…) 부모의 안정 욕구를 채우려고 자녀를 둘러싼 테두리를 견고하게 할수록, 자녀는 성장해서 불안정과 직면할 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안정 요소를 마주할 때마다 발휘되는 직관의 기지를 활용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의적 발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마주치는 부모의 안정 욕구는 아이를 주춤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보다 억누르는 생활이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진취적으로 다가오는 아이디어를 망설이거나 포기하지요. 직관적 착상이 떠오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눌러버립니다. 그리고 계획되고 예상되는 일들에 자신을 맡깁니다. 공무원의 길이 자신의 꿈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부모의 안정 욕구 제거」 62~64쪽
메타인지를 자주 사용하는 습관은 직관 활용에 아주 좋은 도구를 획득한 것과 같습니다. 메타인지는 직관이 발휘되기 직전 충분한 몰입의 단계까지 갔을 때 자신을 바라봅니다. ‘자료 축적 및 분석도 충분하게 했고, 온전하게 몰입도 했네, 이제 잠시 쉬어야 하겠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혹은 주체적으로 하던 일을 멈춥니다. 직관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유를 만드는 것이지요.
과거 1~3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혁명이 구별되는 지점은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일이 만연할 미래에 메타인지는 더욱 중요합니다. 눈앞의 순간마저 예측 불가능할 때라도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돕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자신이 몰입해왔던 사안이 응축될 시간적 여유를 가지도록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메타인지는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메타인지를 수시로 활용하는 사람은 ‘자료 축적 및 분석·몰입·응축될 시간적 여유’라는 일련의 과정을 의식화해서 바라봅니다. 의식화한다는 것은 자기를 직접 이끌어나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은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까지 끌어올리는 데 직관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지요. ---「‘메타인지’ 발동하기」 80~81쪽
남학생들 사이에서 포켓몬스터 카드가 유행하고 있을 때입니다. 한 일주일 동안 카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게임을 했는데, 한 아이가 기존 카드에 무언가를 그려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그림이 새겨진 카드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고 규칙을 향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규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이 주어진다면, 기존 재료를 가지고도 직관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남학생들에게 앞으로는 포켓몬 카드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곳곳에서 탄성과 탄식이 빗발쳤지요. 내심 기분이 좋았습니다. 별안간의 통보에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낀 남학생들이 이제 무엇을 가지고 놀아야 할지 고민하며 직관을 꿈틀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여기 두꺼운 도화지를 마음껏 가져가서 써도 됩니다. 가위도 있습니다. 사인펜도 있고요. 여러분이 직접 포켓몬 카드를 만들어서 노는 것은 허락합니다.”
순간, 다시 남학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 앞다퉈 두꺼운 도화지를 가져갔고, 기존 포켓몬 카드에 있는 캐릭터뿐 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캐릭터가 담긴 포켓몬 카드가 탄생했습니다. 며칠 지나자 포켓몬 카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카드 게임을 만드는 아이들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존의 카드와 게임이라는 논리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새로운 게임 규칙을 만들고, 새로운 카드 모양을 그려내는 창의적 직관을 마음껏 발휘한 것입니다.---「원초적 재료 가지고 놀기」 136~137쪽
세상을 살다 보면 무수히 많은 모순과 딜레마를 마주합니다. 그것도 아주 갑작스럽게 대면하게 되지요. 아빠와 엄마 혹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한 아이들은, 세상의 모순과 딜레마 앞에서 옛이야기를 마주하듯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다양한 해결책을 꺼내서 접목하고 예상하는 직관을 발휘하지요.
따라서 마주한 딜레마 앞에서 그것을 재치 있게 해결하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 중 하나는 다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유대인처럼 『탈무드』를 놓고 같이 대화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서에 그렇게 접근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자녀에게 종교 교육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도 『탈무드』처럼 짤막한 이야기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좋은 격언뿐 아니라 수많은 딜레마적 요소가 있지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 제시한 말, 심지어 예수가 한 말조차도 모순되거나 틀린 부분은 없는지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추천 도서도 있습니다. 바로 『이솝 우화』입니다. 이 책 역시 짤막하지만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솝 우화』를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데 머물지 말고 자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 제 말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딜레마를 품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라.”
---「짤막한 고전 읽고 대화하기」 212~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