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는 모든 문이 닫힌 듯한 그런 상황에서도 룻을 통한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가 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습니다. 우리는 문이 닫히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닫힌 문이 다시 열리기도 합니다. 문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다른 문이 있습니다. 문 하나가 닫혔어도 여러 개의 문이 동시에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닫힌 문만 바라보고 통곡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열어젖힌 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사 문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문을 만드셔서 열어 주실 것입니다.
문이 있다, 없다, 닫혔다, 열렸다 하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문이 따로 없습니다. 길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문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길이 될 수 있습니다.
6절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와 13절의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는 나오미의 말에서 나오미의 신앙고백을 듣게 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 pp. 54-55
사랑을 아는 것은 행복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것은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룻은 이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압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룻은 어디에서 사랑을 배웠을까요? 아마 나오미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오미는 어디에서 사랑을 배웠을까요?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가 배운 사랑은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헤세드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언약 백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언약을 깨지 않으시며 희생으로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을 알려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룻은 나오미로부터 헤세드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헤세드의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해 베푸는 사랑입니다.
--- p. 72
하나님은 수시로 날개를 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끌어안고 날아오르십니다. 하나님의 날개는 강하고, 크고 완전하며, 안전하고 탁월합니다.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_찬송가 419장
하나님이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시니, 우리는 항상 주님의 날개 그늘에 피해야 합니다. 세상은 늘 요동칩니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돌발 상황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시련의 강풍이 할퀴고 지나가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오면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날개 아래입니다.
--- pp. 118-119
세상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밀려나고 쫓겨납니다. 살벌한 평가 기준에 늘 시달립니다. 열심히 해도 안전한 자리가 없습니다. 불안하고 힘들고 괴롭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흐르는 거대한 강물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의 인자하심, 헤세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습니다(애 3:22). 오늘도 이 세상이 존재하고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은혜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은 그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인색하거나 속이 좁지 않습니다. 마음이 넉넉합니다.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풉니다.
--- pp. 137-138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밀애(蜜愛)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갈망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예수님과 연애하는 사람 같습니다. 달콤한 주님의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놓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 p. 16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값을 지불하실 만큼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흠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품에 안길 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온몸을 던지셨습니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왕을 사랑할 만한 자가 아님을 압니다. 얼굴도 검고 비천하며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왕이 사랑하니 술람미 여인은 처음에는 놀라서 도망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우리는 재난을 당한 자였습니다. 죽었던 자였습니다. 폐허 속에서 소망이 없던 자였습니다.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던 자였습니다. 파산한 자와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우리 인생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 우리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 인생에서 어둠이 물러났고 모든 저주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과 아픔, 절망을 다 가져가시므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누려야 합니다.
--- pp. 222-223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 홀딱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말이지 놀라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기막힌 극본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들어 오셨고, 그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우리를 불러들여 우리 인생을 엮어 가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연히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 충만하신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에 의한 하나님의 걸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오묘한 조화 속에 기가 막힌 만남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안으로 끌어넣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교회에 다니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됩니다.
여러분의 삶에 재난이 오고, 내 실수로 인해 문제가 심각해졌다 해도, 재난이나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재난과 문제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 가운데 붙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룻을 통해 다윗 왕가를 일으키셨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 pp. 25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