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내가 늦었어.”
“아냐, 아냐. 나도 방금 왔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하나 늘어났다.
“……무슨 일 있었어?”
“아, 피곤해서.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퇴근 직전에 통화했던 이재이는 이렇게 피곤해하지 않았다. 아직 묻지 못한 말들이 많이 남아 있는 지금, 그녀가 정말 피곤한 게 나을지, 차라리 거짓말이 되어 감추는 것이 나을지 똑똑한 그로서도 알 수가 없다.
“병원까지 나오느라 힘들었지?”
“아냐, 여기 근처 구경도 하고.”
“미안, 요새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까.”
그가 병원 코앞이나마 이렇게 나오는 데는 그 대가가 혹독했다. 아직 병원에 매인 몸이다 보니 미국전 때에는 차마 나올 수 없었지만 오늘 이 시간을 마련하고자 그는 또다시 며칠 밤을 새웠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정신은 말짱했다. 피곤을 느끼지 못하는 강철도 아닌데, 가운 벗고 달려 나오는 순간부터 발에 힘이 붙었다.
“반장 너는 그래도 많이 변한 거 알아?”
“뭘?”
“미안하다는 말도 그렇게 하고.”
재이가 장난스레 들고 있던 풍선 봉으로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호루라기를 불고 지나가던 무리들이 바짝 옆을 스치자 제희가 똑바로 서라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밤에도 붉어져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사람이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아.”
“그러게.”
“오늘 꼭 이기면 좋겠다.”
오늘 이겨야 둘 다 좋았다. 윤제희는 내기에서 이길 테고 이재이에게는 또 다음 기회가 생길 테니. 둘 다 피 끓는 스포츠 정신과 애국심보다는 9년 만에 만난 서로에 대한 생각이 더 깊었다. 옆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며칠 전보다 더 단단해 보인다. 만약 그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면, 그 소원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아 그녀 역시 여러 날을 지새웠다. 그렇게 둘 다 다른 이유로 밤을 새우고도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다.
“시작한다! 저기 봐!”
커다란 스크린 위로 이곳과 같은 붉은 기운이 넘실댔다. 경기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기다린 듯 대한민국을 외쳤다. 간간이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오면 얼굴을 파묻는 이도 있었고 전반에 포르투갈 선수 한 명이 거친 백태클로 퇴장을 당하자 고함 소리도 높아졌다.
“와, 어떻게 저렇게 해? 저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잘못했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사람이 월드컵에 나왔지?”
얼굴이 벌게진 이재이는 화를 낼 때도 얌전했다. 퇴장이라는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구시렁거리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파노라마로 지켜보던 그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박지성이 백태클을 당했을 때에도 웃고 말았다. 다행히 그를 보는 사람이 없어 그렇지 흥분한 사람들 눈에 띄었으면 곤욕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반장, 반장. 이것 좀 마셔.”
어떤 골도 나지 않았던 전반전을 마치고 하프타임이 되자 좀 쉬려는지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사이 미리 준비해둔 음료를 꺼내 그에게 건네려던 재이가 앞에서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과 부딪혀 몸이 휘청거렸다.
“조심해야지.”
제희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잡아 안쪽으로 옮겼다. 얼마나 놀랐는지.
얘는 여자 허리도 막 만지나? 거의 들어버렸는데? 나 허리에 살 좀 있지 않나?
그때나 지금이나 놀란 그녀가 하는 거라곤 커다란 눈만 깜박거리는 것뿐. 곧 아무렇지도 않은 채 다시 음료수를 건넸지만 이미 그 손이 떨렸다. 당연히 후반전이 시작되고도 경기에 집중을 못 하고 옆에 있는 제희에게 그 관심이 돌아갔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또 퇴장이야, 또! 이러다 정말 이기겠다!”
후반전에도 경고 누적으로 또 퇴장이 나왔다. 설마, 설마 하며 두 손을 모으던 사람들이 목청을 한계치로 높이자 그녀도 제 힘을 짜냈다. 구호를 크게 외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생긋 웃는 모습에 그도 무심함을 버렸다. 이 분위기에, 이 열기에도, 저 혼자 갓 쓴 양반 행세를 하던 윤제희 역시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한국의 골이 터졌다.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 폴짝폴짝 난리가 났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 앉고 기뻐하는데 유독 앞자리의 남자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눈에 잡히는 대로 사람들을 껴안다가 뒤에 있던 미녀 이재이를 발견했다. 거기다 더 가관은 이재이도 넋이 나가 자기를 끌어안으려는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엄마야!”
“여기야.”
언제 웃었다는 건지 살벌한 눈길이 남자들을 스치고 재이의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가뒀다.
“아, 놀랐네.”
“여기라구.”
네 자리는 여기잖아.
촉촉이 벌어진 입술에 바로 입을 맞췄다. 방금 전 마셨던 톡 쏘는 주스 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 9년 전 버스 안에서, 그때 마셨던 주스도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그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참고 참았던 마음이, 스스로가 지독하다며 혀를 찼던 마음이, 사람 넘쳐나는 이 광장에서 가벼이 흘러나올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 역시 충동적이나마 다른 남자와 손끝 하나라도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를 이리 만들었다. 그 꼴 보자고 참고 있던 게 아닌데, 그렇게 가볍게 자신을 확인시키려 했던 그의 생각이 묵사발 났다. 한번 맛본 그녀의 입술을 끊어낼 수가 없다.
“바, 반장. 이게. 나는…….”
“너, 앞에 저 새끼들이랑 이러려고 했어?”
“아니야! 내가 무슨!”
“할 거면 나랑 해. 나랑 왔잖아, 여기.”
그녀와의 첫 키스라면, 그 역시 수십 가지 방법으로 꿈꾼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황홀하기보다는 당혹함이 가득한 그녀에게 미안하다 싶으면서도 차마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오늘 그의 인내는 상대편 골대가 흔들릴 때같이 허물어졌다.
“으음, 제희야…….”
다시 입술을 찾았고 이번에는 키스가 더 길어졌다. 연인들과 이곳에 와 키스를 하는 커플이야 심심치 않게 많았지만 유독 고삐 풀린 윤제희는 더 격렬하고, 무자비했다. 오죽하면 그 와중에도 얼굴을 붉히며 쳐다보는 관람객까지 생겨났다.
“여기 나가면 우리 집 있어. 집으로 가.”
“하, 하지만 아직 안 끝났는데…….”
“이재이, 이 정도면 이긴 거야.”
나도, 대한민국도.
그러니까 이쯤 되면 넘어와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