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 미국 이름은 리사 밀러, 한국 이름은 언노운입니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성이 언이고 이름이 노운이라고요?”
“내 한국 이름의 뜻입니다. u, n, k, n, o, w, n, 언노운. 한국어로 하면 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매우 정직한 이름이지요? 풀 네임은 윤미지입니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중략)
“미국 부모님이 리사를 잘 키워 주셨나 봐요.”
그런 말이 얼마나 불편한지 프로듀서 아저씨가 알 리 없었다. 이제 폭탄을 터뜨릴 차롄가?
“미국 아빠는 최고였지만 죽었어요. 강도에게 총 맞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엄마는 저를 집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 p.10~11
‘미지’의 뜻은 진이 알려 주었다. 공항에서 만나 집으로 올 때 내가 물어보았다. ‘어떤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함.’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축복받지 못한 운명을 평생 광고하고 다니도록 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진은 내 이름이 신비한 느낌을 준다고 했지만 나에겐 오직 한 가지 의미로만 다가왔다.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음.’ --- p.24
시간이 지나면서 지칠 만도 했지만 그 애들은 멈추지 않았다. “네 얼굴은 똥 같고 네 눈은 단춧구멍 같아”라는 말과 함께 수도 없이 옐로 칭크, 옐로 국크 하며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놀림을 받고 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을 밀어 버리거나 뺨을 때려 울릴 때가 많았다. 아이들은 나를 슬프게 하기보다는 분노하게 만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아이들을 때려 양아빠 마이클과 양엄마 데이나는 몇 번이나 유치원 원장과 면담을 해야 했다.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을 들었다. (중략)
“리사, 세상에 가장 중요한 진실이 하나 있어. 그게 뭔 줄 아니? 너는 틀림없는 미국인이며 내 딸이라는 거야.”
아빠는 피부색이 다른 미국인 딸을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아빠의 손에 키스했다. 그때 내가 바라본 것은 그의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와 초록 눈동자, 하얀 뺨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 새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 노란 얼굴을 한 계집아이가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p.47~49
아이비는 성장기 내내 받아야 했던 놀림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한 가지 질문이었다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 껍데기는 한국인, 알맹이는 미국인. 그것까지는 인정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며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아이비에게 분명히 말했다.
“난 내가 미국인이란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
자신 있게 한 말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였다. 아빠가 그렇다고 일러주었으니까. --- p.112
어느 날 아이비가 그로서리로 나를 찾아왔다. 두 뺨이 붉게 상기된 그 애는 나에게 보여 줄 게 있다고 했다. 태블릿 컴퓨터로 찾아낸 것은 〈LA 타임스〉의 2년 전 기사였다. 해외 입양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발견했다고 아이비는 말했다. 기사는 두 면으로 나뉘어 크게 실려 있었다. 첫 번째 기사의 제목은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남한의 목사’였다. 기사의 첫 문장을 읽었다.
“베이비 박스는 허름한 동네의 어느 집 한쪽 귀퉁이에 설치되어 있다.”
‘베이비 박스’라는 말이 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기사를 계속해 읽었다.
“베이비 박스에는 담요와 벨이 설치되어 박스의 문이 열리면 벨이 울린다. 이 박스는 버려지는 책들이 아니라 버려지는 아기들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부모들이 원치 않아 버림을 받은 아기들이다……. (중략)”
기사를 읽는 동안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비도 같이 울었다. 베이비 박스를 만들어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기도 전에, 기사의 첫 단락을 읽는 순간 이미 나는 베이비 박스에 들어가 있었다. 베이비 박스. 무시무시한 비밀을 담은 두 단어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 고향은 바로 거기였어, 베이비 박스.
--- p.1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