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에는 작가와 편집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쓴 책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사람들의 수고가 얼마나 있었고 어떤 생각들이 그 책과 함께했는지 사실 거의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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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제품으로써 이 책이 내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었을지 상상해본다. 원고의 잘못을 바로잡는 교열자, 표지나 본문을 디자인하는 북디자이너, 디자이너가 선택한 서체를 만드는 사람,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만드는 제조공장의 기술자와 다양한 색상을 조율하는 인쇄 기술자, 낱장의 종이를 모아 한 권의 책 형태로 묶는 제본. 번역서라면 해외 작품을 일본으로 들여오는 에이전트와 번역자 또한 필요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한 권의 책과 책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평상시에는 별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매일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일을, 그리고 그 일에 담겨 있는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어쩌면 내 의무가 아닐까 싶다.
---「프롤로그」중에서
그녀는 40년이 넘도록 이야기를 쓰는 일을 날마다 계속해왔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스스로 손에 넣은 단 하나의 마법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다시 그녀가 말한 수평선으로 되돌아왔다.
“수평선이란 배니싱 포인트(vanishing point, 소실점)지요. 배에서 보든 높은 산에서 보든 반드시 눈높이에 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 점이 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디에 있든 책장을 넘기기만 하면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마법이며 책은 그 마법을 저 너머에 숨겨둔 수평선이다.
---「작가의 글쓰기」중에서
“문자는 흔히 음성에 비유되지요. 우리가 말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대중적인 선택지는 음성이나 글자밖에 없습니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중요한 것처럼 서체 또한 음성이니까요. 거기엔 밝은 음성도 있고 위엄 있는 음성도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음성으로서의 글자를 접하고 있다. 무릎을 딱 치게 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고양이다. 아직 이름은 없다”로 시작하는 것과 “나는 고양이다. 아직 이름은 없다”로 시작할 때 독자가 받는 인상은 전혀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 권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저자나 편집자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정, 종이, 글자의 간격 등 책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책은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글자의 형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때로는 잊기 쉬운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책뿐만이 아니다.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있을 때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성 광고에도 모두 목적에 맞는 서체가 사용되고 있다. 외치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위압하는 소리. 제목은 큰 소리로 외치고 본문은 조용히 말한다. ---「서체는 책의 음성이다」중에서
다니야마 씨에게는 설령 조그마한 힘이라도 활판인쇄의 세계를 남기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건 나이가이모지 인쇄에서 일하는 동안 그 안에서 싹튼 작은 꿈이다.
“어쨌든 활판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남겨서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어요. 카드나 명함 등을 인쇄하면서 겨우 생활하고는 있지만, 원고를 받아 조판을 만들고 인쇄물을 고객에게 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인쇄소에서 넓고 얕게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제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큰돈을 벌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럭저럭 채산을 맞출 수 있는 정도에서 찾아가고 싶습니다. 분명 머지 않아 사라져버리겠지만 역시 사라지기에는 조금 아쉬운 세계니까요.”
다니야마 씨는 나이가이모지인쇄에서 일할 때 장인들로부터 여러 번 “원고는 읽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 문선을 하거나 식자를 할 때, 또는 인쇄할 때 글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일이 잘 진행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낡은 인쇄기에서 시나 하이쿠가 교정쇄가 되어 나올 때 그는 무심코 작업하는 걸 잊고 한 줄
한 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고 한다.
“정말 좋구나, 생각했지요.”
그는 소리 내어 밝게 웃었다. 결국 자신은 활판으로 인쇄되는 책에 이유 없이 매료되어버린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직 활판으로 인쇄물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닙니다. 어딘가 한 부분에서는 활판을 사용해 인쇄하고 싶다는 수요가 있을지도 모르고, 자신을 위해서 소중하고 특별한 책을 활판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고 누군가가 생각했을 때 온 디맨드(on demand, 이용자의 요구에 따라 네트워크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옮긴이)만이 선택지라고 한다면 쓸쓸하지 않을까요?”
“그때…….” 그는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하고 손을 들고 싶어요. 이곳을 그런 장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활판인쇄의 세계」중에서
“전자책의 등장으로 책을 둘러싼 환경은 급변할 거예요. 하지만 전 그 속에서 ‘책’이라는 공업제품 그 자체의 가치는 더 높아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부분적으로 수작업 공정을 강화하고 독특한 뭔가를 더하기만 해도 책의 분위기는 확 바뀌기 때문이죠.”
이어서 그는 “뭐, 직육면체 책이 가진 제한된 세계의 이야기지만 말이에요” 하고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뜻밖에 강한 어조였다.
“적은 부수라도 누군가에게 특별한 한 권, 그 사람에게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한 권을 만들려고 할 때 제본 기술이 잊혀진다면 책을 둘러싼 소중한 세계는 사라져버릴 겁니다. 거기에는 아직 심오하고 우리 마음에 호소하는 뭔가가 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종이를 책으로 묶는 기술, 제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