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1년 10월 17일 |
---|---|
쪽수, 무게, 크기 | 96쪽 | 206g | 148*210*15mm |
ISBN13 | 9788955615777 |
ISBN10 | 8955615779 |
발행일 | 2011년 10월 17일 |
---|---|
쪽수, 무게, 크기 | 96쪽 | 206g | 148*210*15mm |
ISBN13 | 9788955615777 |
ISBN10 | 8955615779 |
삶 속에 깃든 죽음을 포착한 상상력_보르헤스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 나펠루스 추기경 네 명의 달 형제들 작가소개 - 구스타프 마이링크 |
1866년에 태어난 허버트 조지 웰스는 20세기 초반을 전후로 하여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SF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이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환상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허버트 조지 웰스는 어렸을 적에 여러 분야의 과학을 공부했던 점을 살려서 자신의 작품에서 환상적인 요소를 바로 과학에서 찾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허버트 조지 웰스만큼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19번째로 소개된 작가 구스타프 마이링크는 여러 면에서 허버트 조지 웰스와 비교될만한 작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1868년에 태어난 구스타프 마이링크는 허버트 조지 웰스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고, 작품 속에서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허버트 조지 웰스는 역시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서 2번째로 소개된 작가이니 보르헤스의 환상 문학의 관점에서 둘다 그 범주로 분류되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스타프 마이링크는 허버트 조지 웰스와 동시대에 살면서 무엇을 추구하였기에 이 책 <나펠루스 추기경>을 통하여 재조명받게 되는 것일까? 그는 환상의 측면을 과학이 아닌 마술을 통하여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버트 조지 웰스와 극명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실린 3편의 작품 중에서 바로 <네 명의 달 형제들>이 그러한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모습을 여실히 표현해주고 있다. 마치 이 세계의 사람들이 아닌 듯한 인물들이 인간의 기계 문명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그러한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군인 수천 가지 형태의 기계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계들은 스스로 힘을 갖게 되었는데, 인간들은 아직도 눈이 멀어 자기들이 주인인 줄로 알고 있지요.
기관사 없는 기관차가 바윗덩어리들을 싣고서 분노로 미친듯이 돌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을 무쇠 몸통으로 깔아뭉갭니다.
(중략) 땅에서는 흉한 가시가 달린 뽀족한 금속들이 자라나 다리를 걸고 살을 찢으며, 말없이 환호하는 전보문들이 오갑니다.
(중략) 전기 흐르는 독사가 땅 밑에서 요동칩니다.
(중략)탐조등들이 이글거리는 야수의 눈알로 암흑 속을 감시합니다.
- p. 80 ~ 81 -
<네 명의 달 형제들>에서 나오는 위의 표현은 마치 영국의 산업 혁명에서부터 1차 세계대전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기계와 금속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과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비판도 인간이 아닌 달에서 온 존재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기에 당시 과학 내지는 기계를 신봉하는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구스타프 마이링크는 과학이 아닌 마술과 같은 믿기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을 통하여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다른 2편의 작품인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와 <나펠루스 추기경>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Vivo - 나는 살아 있다 - 라는 묘비에 쓰여진 기묘한 문구와 함께 시작되는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는 나름의 철학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150살이 되어보이는 요한 오버라이트의 이야기는 인간의 무의미한 희망과 덧없는 기다림에 대한 철학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내가 있는 현실 세계의 건너편에 있는 세계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를 살찌우는 것이 바로 현실에서 내가 품고 있는 무의미한 희망과 기다림이라면 어떠한 생각이 들게 될까? 실제 요한 오버라이트는 자신의 희망과 기다림으로 배를 채우고 있는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희망과 기다림을 포기함으로써 또 다른 나는 굶주리게 되고, 본인은 영속된 삶을 살고 있던 것이다. 짧은 단편이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희망과 기다림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나펠루스 추기경>역시 종교와 연관지어 환상과 동시에 새로운 공포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플갱어의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인공인 라트슈필러가 '푸른 형제들'이라는 종교에 심취해 있다가 빠져나온 이력을 말하면서 현재는 물속이라는 심연의 공간 아래에 존재하는 땅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과학에 대한 비관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종교에 대한 환상적인 모습을 적절히 대비시키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구스타프 마이링크라는 작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구스타프 마이링크에 대하여 한발 가까이 다가간 느낌과 동시에 허버트 조지 웰스라는 걸출한 작가와 비교하여 그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 심지어 이들 작품들이 구스타프 마이링크를 대중들에게 작가로 각인시킨 <골렘>이라는 작품을 예고하고 있다니 그 작품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보르헤스의 구스타프 마이링크에 대한 평을 통하여 다시금 그를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마이링크는 죽은 자들의 왕국이
산 자들의 왕국으로 들어온다고,
눈에 보이는 우리의 세상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침입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일의 작가 구스타프 마이링크를 알게 된다. 1915년 발표한 《골렘》(골렘은 히브리어로 흙덩이를 의미하며, 중세 유럽의 한 유대교 신비주의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원래는 핍박받는 유대 민중을 돕는 인물로 창조되었으나, 신 이외에는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는 기독교적 믿음에 따라 악의 화신으로 변질되었다. 마이링크 이외에 같은 제목의 보르헤스의 시가 있으며 미국의 환타지 소설가 데이비슨 또한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마이링크의 소설 속에서 골렘은 실제하는 괴물이 아닌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영화 《반지의 제왕》 속 ‘골룸’을 어두운 프로도라고 여길 수 있음을 보면 유추해볼 수 있다. 맞다, ‘골렘’이 바로 ‘골룸’이다.) 은 당시에 20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읽어보지 않아 소설 《골렘》의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책에 실린 세 편의 단편이 바로 《골렘》을 예고하고 있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해볼 따름이다.
“마이링크는 죽은 자들의 왕국이 산 자들의 왕국으로 들어온다고, 눈에 보이는 우리의 세상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침입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
삶에 대해 이만큼 비관적인 글을 발견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에서 ‘기다림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이 어찌 죽음을 피해 가겠는가.’ (p.21) 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할아버지가 참여한 어떤 모임의 일원인 요한 헤르만 오버라이트라는 사람을 찾아 떠난 여행과 만남의 기록이다. “... 그분은 내게 소원을 갖는다는 게 무엇인지, 기다림과 희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가르쳐 주었어요.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또 그 허깨비들의 가면을 잡아채는 법까지. 우리는 그것들을 시간 거머리라고 불렀지요. 거머리가 피를 빨아 먹듯이 그것들은 인생의 참된 수액인 시간을 우리 심장에서 빨아먹어 버리니까...” (p.26) 인간이 이 막막한 삶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기다림과 희망’이 소설 속에서는 거머리와 같은 존재에 비유된다. 얼마전 읽은 소설에 등장하는 ‘희망 고문’과 일맥 상통하는 듯한 이러한 전개는 결국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품고 있는 ‘기다림과 희망’을 자양분 삼아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 인간은 누구나 의사나 변호사를 만나려고 기다릴 때, 또는 관청의 대기실에 앉아 기다릴 때 신경이 닳는 무기력감을 느끼지 않소? 우리가 삶이라고 일컫는 것 역시 바로 그런 대기실, 죽음의 대기실 같은 것이오...” (p.33)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기력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무기력함을 향한 작가의 이 지독한 상상력은 참으로 비관적이다.
「나펠루스 추기경」.
히에로니무스 라트슈필러와 나펠루스 추기경... ‘피로 세례를 하는’ 기묘한 의식을 가지고 있던 금욕적인 교파의 창시자였던 나펠루스 추기경과 ‘인식의 측심연’을 호수 바닥에 떨어뜨리는 행위로 스스로를 찾고자 하였던 히에로니무스 라트슈필러... 신비하고 마법의 기운이 감도는 작가의 어두운 세계관, 하나의 인물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자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 혹은 도플갱어적인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탐구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네 명의 달 형제들」.
소설은 샤잘 백작의 시종이었던 마이링크(그렇다, 작가 본인이 소설 속에 있다)가 이후 두 번째 주인이었던 마이스터 페터 비르치히, 그리고 그 친구들인 크리소프렌 차그레우스와 사크로보스코 하젤마이어와의 만남에 대하여 기록한 기록물이다. 태양이 아니라 달의 형제들로 묘사되는 이들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 몽환적이지만 때때로 굉장히 현실적이고 주도면밀하며 (21세기인 지금 생각해봐도 여전히) 예지의 힘을 품고 있다. “여자들이 아이가 아니라 자전거나 연발총을 낳게 된다면, 갑자기 결혼이 엄청나게 많이 이루어질 겁니다. 인류가 아직 발전하지 못했던 황금시대에는, 인간들은 오직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만 믿었지요. 그러다가 점차로 뜯어먹을 수 있는 것만 믿는 시대가 왔어요. 이제 인간들은 완전한 봉우리에 기어오르고 말았소이다. 인간은 이제 팔 수 있는 것만을 현실로 여기게 되었다는 거요... 그리고 인간들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들이 낳은 기계에는 최고급 윤활유를 바르면서 정작 자신들은 마가린으로 만족하지요. 기계들이 자신들의 수고를 천배로 덜어 주고 온갖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인간들이 까맣게 잊고 있는 사실이 있으니, 기계도 배은망덕한 자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오.” (p.69)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문구가 아닌가. 현존하는 인류에 대해 이렇게 정확하게 축약된 판단은 오히려 바로 지금이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구스타프 마이링크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조원규 역 /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 19 나펠루스 추기경 / 바다출판사 / 96쪽 / 2011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