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녀원 바로 옆인 그린 스트리트 1806으로 이사를 갔다. 오래지 않아 어머니와 수녀님들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수녀님들은 어머니의 헌신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주마다 참회를 하고, 날마다 묵주기도를 드리고, 모든 천주교 사제들을 공경하는 어머니를 수녀님들은 관심을 보이고 귀히 여기셨다. 솔직히 나는 사제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보이스 타운 (Boys' Town)과 같이 사제에 대한 영화를 몇 편 보고 난 후에는 하나님과 사람을 이렇게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학교, 교회, 집에서 우리는 사제직의 영광과 더불어 주님을 위해 사제들이 살아간 영웅적인 삶에 대해서 들었다.
로마 가톨릭의 사제직은 모든 소명 중에서도 가장 바람직하고, 명예롭고, 존경받는 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명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이 그런 명예를 누리기에는 너무나 평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제직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그런 생각이 오만하고 주제 넘는 느낌이 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더욱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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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학교의 주입식 교육은 수 세기에 걸친 관습과 기술로 태어난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능력과 세력과 화려함이 커질수록 우리가 누리게 될 즐거움과 특권을 기대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교실 학습, 토론, 운동도 흥미 있는 거리였지만 한 해의 최고 행사는 가을 피정이었다. 그 때는 교실 수업을 한 주 내내 생략하고, 시카고나 밀워키 또는 해외에서 오시는 피정 전문가들의 고무적인 메시지를 듣는 것이 일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피정은 마르케트 대학에서 오신 한 예수회 수사님이 진행하신 때였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마디건으로 기억한다. 그분의 말씀은 생생하고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물론이고, 영적 이었다. 그분은 기도, 영원한 순결, 자선, 순종, 마리아에 대한 헌신 및 사제직까지 모든 주제를 다루셨다. 수련회 후에 마디건 신부님은 우리 각자에게 작은 명판을 주셨는데, 그 위에 직접 “나는 바라고, 나는 할 수 있고, 나는 할 것이다”라고 적어 주셨다. 이 작은 명판은 이후 십 일 년 동안 내 책상위에 있었다.
매일 아침 나는 의식에 따라 이 말을 반복해서 읊조렸는데, 워싱턴의 맥나마라 주교가 내 머리에 손을 대고 내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사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그렇게 했었다. 로마는 인내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데, 이는 내가 이 길을 끝까지 가게 된 것과도 관계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그 목적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나에게는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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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 수도회에는 2년의 수련 기간이 있다. 이는 많은 수도회들이 1년을 요구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중에 수면 부족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자정에 일어나 1시간 15분 정도 함께 정해진 기도를 드리고 라틴어 찬송을 불러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스카풀라에 입을 맞추고 다시 잠에 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 날 밤의 구원을 확신하였고, 상급자들 역시 불의하거나 정결하지 않은 생각이 우리를 덮치지 못할 것을 재차 확인하였다. 새벽 다섯 시, 한창 깊게 잠이 들면 더 어려운 일이 찾아왔다. 수련자 중 하나가 층마다 다니면서 나무로 된 딱따기를 요란하게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라. 형제들아 일어나 주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라.” 나는 언제나 침대에서 뛰어 일어났다. 우리는 침대에 불이 난 것 처럼 생각하라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30분 후에 묵념기도를 할 때면 우리 모두의 얼굴에는 빛이 났다. 우리는 공식적인 기도문인 성무일도를 암송했다. 그렇게 한 후에는 미사가 있었다. 8시 또는 8시 30분이 되면 저명한 천주교 신비주의자들의 저작을 읽고, 라틴어, 전례, 그레고리안 음악을 공부했다.
또한 일 주에 세 번씩 저녁이면 가르멜 수도회 모든 공동체가 어둡고 큰 회랑에 모여 시편51편(가톨릭성경에서는50편),“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Miserere mei, Deus)를 찬양했다. 참회하는 시편을 낭송하는 동안 우리는 엉덩이를 짧은 가죽 매로 쳤다. 이런 행위는 인간 내면에 깊이 숨어 있는 타락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다양한 고행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영성을 지녔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식당 입구 바닥에 누워서 수사들이 자신을 밟고 지나가게 한다든지, 식사 시간에 수사들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심령의 가난함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또한 가시 면류관을 쓴 채로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간다거나, 수도자들에게 다니면서 “알라파(alapa)”, 즉 뺨을 맞는 것은 우리 복되신 주님의 수난을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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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6일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었다. 바로 워싱턴 D. C.에 있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성당(Shrine of theImmaculate Conception of Mary)에서 서품을 받는 날이었다.
나의 마음은, 불가능한 꿈이 실현되었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득했다. 나는“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사제가 될 것이고, 그것도“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제”가 될 것이다. 이 의식 동안 나의 요청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직접 임하실 것이다. 빵과 포도주가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됨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나의 소유물이 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되고 천사들보다 훨씬 높이 격상되어 무엇보다 거룩한 의식을 행할 것이다.
바로 그 영광스러운 아침, 사제 서품 후보자 스무 명이 성당에 도착했다. 도미니크회 수사,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 프란치스코회 수사, 카푸친회 수사, 예수회 수사, 삼위일체 수도회 수사, 요셉회 수사, 오블라띠 선교수도회 수사들이 있었다. 나는 유일하게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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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의 불만감이 필리핀에서 돌아 온 즉시 시작됐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성무일도 암송, 묵상, 공식기도도 아무 의미 없이 시를 외우는 것같이 무미건조한 일이 되었다. 미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일은 덜 실제적으로 다가왔고, 그저 영적인 실체가 결여된 형식적인 일이나 전통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제들의 행동에서도 나와 비슷한 태도를 보았다. 나는 여전히 기도를 드리며 내가 예전에 알았던 그 느낌을 다시 얻고자 노력했다. 나는 내가 엄격한 수도원 생활의 규율을 어겼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마닐라에 있던 타고 남은 건물들처럼 수척한 해골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즉, 벽은 있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왜 선교지에 있는 많은 사제들이 성무일과 낭송과 같은 관습들을 멀리하게 되는지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예전에 나에게 그렇게나 열렬한 자부심과 명예를 주었던 성의도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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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을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엄청난 열망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이미 메뚜기가 먹어치워 버린 지난 세월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천주교 친구들이 성경을 열고 그것을 읽고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냐하면 성경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글로 소통하신 것이다. 나에게는 진리를 들은 자가 진리에 무심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한 때 내가 진리에 눈과 귀를 닫았을 때에도, 나에게 빛을 비추어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물, 생명수를 마셨을 때 나의 영혼은 채워졌고, 나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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