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론 바울서신 내에는 성과 결혼,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복음사역에 있어도 남녀의 역할과 자세에 관한 본문이 다수 있다. 그 중에는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다는, 그래서 ‘인류의 대헌장’(Magna Carta of Humanity)이라
불리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도 있다. 그런가하면 고린도전서 11장에 남자와 여자가 기도와
예언할 때의 자세, 특히 머리 모양에 대해 가르침으로써 당시 여자들 역시 남자들과 동등한
사역에 참여했음을 보여주며 이어서 두어 장 뒤에서(14: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
는 고린도전서 또한 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디모데전서 2장
12절과 나이 든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는 디도서 2장 3-4절 말씀
도 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저자인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남녀의 차이는 없다고 선포한 후, 다시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하라고 가르
칠 수 있는가? 다르다 못해 상충되어 보이는 본문들이 한 권 성경 안에 기록된 것일까? 이
성경의 본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르고,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
쾨스턴버거는 평등을 명분으로 여권신장에 앞선 북미 문화가 새로운 사회의 표준/윤리를
따르도록 교회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는 이미 말씀 속에 존재하고 있는 긴장
을 고려할 때 절반 만 옳은 의견 같다. 톰슨은 비평 이전 시대의 주석가들조차도 이 앞뒤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본문들의 상세한 뜻을 알기 위해 씨름했고, 따라서 우리의 이러한
씨름 자체가 전통적인 것이라는 지적을 한다. 이 전통적이던 씨름이 우리에게는 없거나 사라진 듯하다. 위에 언급된 본문들 일부는 교회
나 신학교에서 거의 설교되지 않으며, 아직 교단 내에서는 변변한 연구도 찾아보기 어렵다. 본 논문은 바울의 남녀관이라는 제목 하에 관련 본문들을 종합해 보려는 시도이며, 이 분야
에 대한 다른 학자와 교단들의 연구를 경청하고 또한 비판하는 작업의 시작이다.
--- pp14~15
창세기의 남녀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남자와 친근하기 위해서 남자를 사모한다. “사모하다(창 3:16;
아 7:10)”는 남성과 여성 양편이 상대의 성을 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적인 친밀
성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갈망이다. 비록 여자가 남편의 성적 친밀성을 사모함에도 불
구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린다. 타락결과, 남자와 여자의 협동과 상호보존성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갈등과 주도권 다툼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
시작한 죄성의 역할들이 성적 분화/장벽의 원인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결론은 갈라디
아서 3장 28절의 남자와 여자의 성적 분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파기될 자료임을
확인한다.
--- pp.61~62
갈라디아서의 남녀관
갈라디아서는 고대 사회에서 도저히 넘어설 수 없었던 불평등의 방벽들이 이제 무너지고
차별은 끝나서 새로운 관계들이 수립되고 믿는 모든 사람이 새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선언
한다. ‘믿음이 온 후’에(갈3:25) 에 대한 갈라디아서의 논의는 겨우 네 절(3:26-29)에 걸
쳐 있을 뿐이지만, 풍성한 복음의 본질과 그를 에워싼 무한한 함의를 담고 있다. 바울서신
특유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갈3:26, 28) 표현 역시 두 번이나 등장함으로 ‘하나
님의 아들 됨,’(26절)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 ‘그리스도로 옷 입다,’(27
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28절) 그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29절) 등과도 긴
밀하게 연결되어 큰 얼개를 형성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논의하는 바는 이 ‘단호한 진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 있다. 남녀 동등성에 대해서 던
(Dunn)은 이러한 변화들이 얼마나 큰가를 “십자가가 새 창조로써 옛 세상을 대치하는 ‘종말론적 전환’을 창조했다”고까지 제시한다. p.98~100
디모데전서의 남녀관
디모데전서 2장은 여성관련 본문 중 가장 많이 논쟁되어 온 본문이라 할 수 있다. 디모데
전서의 남녀관(2:11-15)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는 서신전체 내용은 물론, 그 에베소지역의
철학, 이교제의 등의 문화 종교적 배경 이해가 필수불가결이다. 그 이유는 서신자체의 저작
목적이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함이라(딤전 1:3-4)”고 서두에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츠(Gritz)는 아
데미 제의는 꿀벌공동체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꿀벌 공동체는 여왕벌, 일벌(암컷), 숫펄로
구성된다. 여왕벌은 숫펄과 교미하여 일벌로 부화될 알을 낳으나, 숫펄과 교미 없이는 숫펄
로 부화될 알만을 낳는다. 일벌은 여왕벌과 부화될 알을 돌보고, 꿀과 꽃가루를 모아서 영
양공급자의 역할을 한다. 숫펄은 노동하지 않고 꿀을 소비한다. 겨울에는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일벌들은 숫펄들을 쫓아내거나 굶겨서 죽인다. 특히 여왕벌이 교미 없이 숫펄을 낳
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아데미 여신이 남자의 창조자라는 인식이 에베소에 만연하였기 때문
에 아데미 여신을 신봉하는 여자들은 남자들(숯벌)에 비해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사도바울은 모계중심사회의 오랜 역사의 모태인 아데미여신 제의와 영지주의 문화에 길들여
져 이교제의영향에 물든 그릇된 구원관에 사로잡힌 에베소상황을 올바로 파악하였다. 그가
이러한 에베소에 기독교 복음을 통한 구원관을 선포하는 것이 본문인데, 그의 배움과 가르
침에 대한 랍비적인 사고와 구약성경지식도 본문해석을 위해 중요한 도구들로 사용됨을 볼
수 있다.
--- pp.103~104
이러한 문화를 배경으로,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계속 머물면’의 의미는 무
엇인가? 바울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와 가르치라”(2:11-12b) 고 하여 여자들에게
조용한 중에 기독교복음을 배우라고(11절) 고 한 것은 그 당시의 사회문화상황에 비추어보
면 가히 개혁적인 발언이다. 그는 12절에서 두 가지 금지사항, 즉,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남자들에게 권위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기존 해석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로 접
근하였다.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랍비식 관행을 적용하면, 11절의 조용한 중에서 배우라는
명령은 12절의 조용한 중의 가르침으로 함께 가야한다. 따라서 우리 구주하나님께서 그 아
이출생을 통해서 구원하실 단수와 복수 주어 대상들은 모두 13-14절에 선행되었던 하와와
아담을 포함한 하와와 아담의 모든 자손임을 규명해 보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 성취(딤전 2:4)’로써 근접문맥
과 일치하는 성경자증의 하나의 사례라고 추정한다.
--- pp.20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