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어떤 위정자가 독재자였고, 누가 민주적인 통치자였는지 한 칼에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가장 손쉬운 독재자 판별법이 있다. 책을 불태운 자가 독재자다. 네로, 진시황,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을 불사르는 사람이 빼앗고 없애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상력, 꿈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또한 ‘남과 다른 생각’이며, 남의 말이나 남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다. 그렇다. 책을 읽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일이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 귀찮고 힘든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므로, 더욱, 인간으로 태어난 지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책 읽기는 때로 어렵다. 그래도 나는 읽는다. ---「그래도 나는 읽는다」중에서
# 책값을 넉넉하게 주자 책 속에 들어 있는 지식과 정보를 다른 방법으로 얻으려면 그 수십 배, 수백 배의 비용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책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 책을 사주러 함께 서점에 가거나, 아이들이 책을 사러 서점에 갈 때도 마찬가지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책값을 좀 많이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 좋다. 내 경험으로는 돈을 조금 가지고 가니까 정작 필요한 책이나 마음에 드는 책을 못 사게 되거나, 다른 책과 비교해 값이 싸다는 이유로 책을 선택하게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물론 세 권의 책을 사서 그중에 한 권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패한들 어떠랴. 실패해보지 않으면 성공에 익숙해질 수 없다.
# 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보게 하자 하나의 주제를 파악하는 데 한 권 가지고는 부족하다. 같은 주제나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면,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감’이 온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필자마다 기술하는 방식이 다르고,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 분야에 대한 시각도 따라서 넓어지게 된다. 우주나 공룡 또는 정원 가꾸기 등등 어떤 주제라도 한 권에만 만족하지 말고 그 분야에서 여러 권의 책을 읽다 보면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넓고 깊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순간 뭔가 확 뚫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통(精通)하게 된다는 것이다.
# 끝까지 다 읽으라고 강요하지 말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청소년을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책은 듬성듬성 읽을 수도 있고, 거꾸로 읽을 수 있고, 읽다가 그만둘 수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관객을 기다려 주지 않지만 책은 언제나 독자를 기다려 준다. 책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다. 남들이 다 읽는다고 해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책을 무리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식에 비해 내용의 밀도가 떨어지는 책을 읽는 일도 시간낭비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 그때 바로 그만두는 게 좋다.
# 의심하면서 읽게 하자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저자에게 조금 기가 죽기 마련이다.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인쇄되어 나온 글자에는 어딘가 권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책은 사람에게 의심하는 마음, 비판하는 생각을 길러주지만, 또한 그것들을 빼앗아버리기도 한다. 잘못된 생각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 책을 읽는 행위는 무의미해진다. 무언가 의십쩍은 대목이 있다면 의문을 끝까지 파헤쳐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까짓 책!」중에서
『독서의 역사』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에 의하면 서구에서는 10세기까지 묵독이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도 모친이 보낸 편지를 말없이 읽어 부하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시저도 연애편지를 소리 내서 읽지 않은 것이 특별한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사실 사람이 책을 ‘혼자서 조용히’ 읽게 된 것은 인간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단독자로서 세계와 마주하게 된 이후의 습관이었다.
중세 유럽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책이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책 읽는 소리의 낭랑함으로 읽는 자의 기품과 성정을 가늠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이 책 읽는 소리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 듯.
조광조에게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의 낭랑한 독서성(讀書聲)에 반한 처녀가 담을 넘었다. 조광조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 돌려보냈다. 그녀는 잘못을 뉘우쳤고, 훗날 다른 집안으로 시집갔다. 기묘사화 때 그 남편이 조광조를 해치려 하자 그녀는 자신의 젊은 시절 일을 이야기하며 조광조를 해치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독서는 역시 묵독(?讀)이 기본이다. 책을 읽는 일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아무래도 책 읽는 속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소리를 내고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되어 있다.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에 따르면, 원래 묵독의 습관이 유럽에서 지방도시까지 널리 퍼진 것은 19세기 이후부터라고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에 묵독이 독서습관의 중심이 된 이후, 작가도 독자의 묵독을 전제로 글을 쓰면서, 독자의 습관에 맞게 글의 내용도 ‘내면화’되어갔다는 것이다. 즉 소리 내어 외부에 알릴 만한 내용보다는 혼자서 묵묵히 읽고 내면에 간직해두기 좋은 내용으로 책의 내용이 바뀌어갔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묵독이 일반화되자 순식간에 책에 담긴 표현도 풍부해졌다고 한다.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례가 에로틱한 주제나 묘사라고 한다. 책을 소리 내어 읽던 시대에는 아무래도 표현이 담백하거나 우회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혼자 소리내지 않고 읽는 독자를 전제로 쓴 글은 그 내용이 훨씬 더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히라노 게이치로는 음독(音讀), 즉 소리 내어 읽기를 반대한다. “누구에게 들려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지극히 건전한 내용의 책이 아니면 도저히 소리 내어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소리 내어 읽는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