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엘리야에게 가장 먼저 “데이비드랑 서로 아는 사이였니?” 하고 물었다. 아이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럼 왜 그런 거니?” 엘리야가 말했다. “그 애가 공원에 나타났을 때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저한테는 칼이 있었고요.” 내가 무너진 것은 그때였다.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엘리야에게 말했다. “나는 데이비드가 아니라 너 때문에 울고 있단다. 네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그레이스 아주머니.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그 아이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나는 엘리야에게 우리 아이와 세 형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우리한테서 소중한 친구를 빼앗아 갔구나.” 그러고는 그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했다. “하지만 아줌마가 널 용서한다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아이를 안아 주었다.
---「내 아들을 죽인 소년」중에서
수련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용서의 마음은커녕 갑자기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극심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분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휙 하고 온몸을 휩쓸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내게 용서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분노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나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 연쇄살인범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더 나은 과거에 대한 희망을 놓는다는 것」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반대편 테이블에 나를 성추행했던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열두 살 소년이 되어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그가 어린 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설명했다. 덩치가 무척 큰 그는 일어서서 항의를 하려고 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앉으라고 말했고, 그는 내 말대로 했다. 비록 당신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이제는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두 번 반복했다.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마치 내 용서가 그를 산산조각 낸 듯했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였다. 이 사람에 대한 기억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제대로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떨리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카페에서 나오며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 내 힘을 모두 되찾은 것이다.
---「용서라는 실질적 복수」중에서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을 성폭행범들을 증오하며 보냈고, 그들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들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사악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도 날 때부터 그렇진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처럼 아무 죄 없는 아기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해서 타인에게 그토록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굴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내 본질과 존재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다」중에서
그가 “내가 죽일 놈이에요. 내가 죽일 놈이에요” 하며 울기 시작하자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와 마주했던 자리에서 문득 깨달았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세상이 선뜻 그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을 것임을, 그리고 내 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세상에 요구할 권리가 내겐 없다는 것을…. 비록 아버지가 그립긴 하지만 복수심은 내 눈을 멀게 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증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그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 그렇다고 더 나빠질 필요는 없다는 것도 배웠다.
---「상처 떠나보내기」중에서
호주 원주민에게 치유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을 짓밟으면 너무도 깊은 상처가 남는다. 부모, 가족, 공동체, 문화로부터 강제 격리된 잃어버린 세대가 입은 상처는 특히 그랬다.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서 아물 상처가 아니다. 약을 먹을 수도 없다. 그들에게 치유와 용서라는 개념은 다루기 어려운 동시에 큰 도전을 의미한다. 화해는 영혼이 회복된 후에야 가능하다. 우리가 사회적·정서적·심리적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마음과 정신을 바로잡고, 자신의 정체성을 공동체의 뿌리와 다시 연결하고 재건하는 과정을 통해 행복감을 되찾은 후에야 여러 세대에 걸친 역사적 고통을 대면하고 다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용서를 받거나 용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세월, 도둑맞은 행복」중에서
깨어난 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 죽지 않고 생명을 부지했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꼈다. 엄청난 은총을 받은 것만 같았다. 사랑과 동정, 연민, 기쁨으로 가득 찬 감정이었다. 나는 이 생명의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세상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 생명의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증오심 없이 살아가고, 복수를 하거나 폭력적인 앙갚음을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마지막으로 이 갈등의 순환 고리를 반드시 끊어야 했다. 나는 이런 행동이나 감정을 용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살 폭탄 테러범이 내 용서를 원할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람은 죽었으니 그가 무엇을 원할지 우리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 생명을 구해 준 모든 이들이 온몸으로 보여 준 모범을 따르는 것뿐이다. 인류애, 연민, 공감은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 두 번째 인생에서 실천하고 싶은 덕목들이다. 내 목표는 열아홉 살짜리 북잉글랜드 출신 남자가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내 목숨을 앗아 가려 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삶」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