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성도’라는 단어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이 단어의 의미는 ‘완성’이 아니라 ‘진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가리켜 ‘거룩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처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마저도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져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기독교가 가지는 복음의 핵심이 ‘성도’라는 한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되었다는 말은 바로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지금 막 태어난 어린 아기도 완벽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처음 믿었다고 해도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 바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 받습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로 성도라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 pp. 12-13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혹시 자랑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이거나 혹은 자랑할 수 없는 것을 착각하는 경우일 뿐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자랑’이라는 뜻을 가진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 ‘할랄(빛나다, 찬양하다, 찬송하다, 자랑하다)’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도 있지만, ‘바드(거짓말, 자랑, 과장)’, ‘가온(영화, 위엄, 자랑, 교만)’, ‘알리츠(기뻐하다, 자랑하다)’와 같은 단어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자랑’은 대체로 거짓말, 허풍, 교만, 자기과시와 같은 부정적 행위로 연결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자랑이 전혀 없고 오직 참된 자랑은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본문 말씀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에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러한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며 행하시는지를 소개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세우시되 주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 pp. 45-46
교회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시작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의 임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그 하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미래적인 표현으로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I will build My church, 마 16:18).”는 주님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치리의 의미를 갖는 18장 17절에 한 번 등장할 뿐입니다. 보통 ‘에클레스아’라고 하면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지만, 사람들만 모여 있다고 해서 다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인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2장으로, 이들 위에 성령님이 임하였을 때부터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교제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위임된 사명을 다해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모이는 일에만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승천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런데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끼리만 모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흩으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야고보가 순교를 당합니다. 결국 흩어집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 pp. 98-99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우상 제물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데, 그에 따르면 우상 제물을 편하게 먹을 수는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가 이것을 보고 약한 양심에 상처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고전 8:12)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상 앞에 있었던 음식을 먹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먹어도 되지만, 먹을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의 기준이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심이나 사랑이 기준이어야 하며, 결과적으로는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기를 먹는 것이 실족하게 하는 일이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고전 8:13).
--- p. 185
고린도 지역은 우상 숭배가 지극히 극심했던 도시입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까지 항상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도시에서 행해지는 이교도들의 종교 축제는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행사였습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축하 공연이나 연회, 그리고 길거리에서 행해지는 각종 향연은 고린도 지역의 주민들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행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마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먹고 뛰놀던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출 32:1-6)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의 제단에서 즐거워하고 뛰어 노는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공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금하시는 일입니다.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p.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