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문득 결혼이란 어쩐지 잔뜩 기대하고 시킨 피자의 토핑에서 뭔가 빠졌음을 다 먹은 후에 아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한 만큼 설레고, 대낮에도 별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긴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그 허전한 10%를 확인하는 데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그걸 세경은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나타난 강후를 보고 알았다.
지강후.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든 남자.
5년 전, 그가 던진 이별통보. 그건 뜻밖이었다.
캄캄한 밤. 비가 이쑤시개처럼 내리꽂고 있었다. 세경은 그 비를 온몸으로 맞고 서 있었다. 몸에 이쑤시개 굵기의 비가 꽂히고 있는데 피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대신, 가슴 언저리가 무지막지하게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자존심이랄 수도 있었겠다. 시내 한복판에서 남자에게 차이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최소한 그건 알 수 있던 날이다. ---pp.14-15
“날 어떻게 알아? 난 당신을 모르겠는데.”
세경은 그의 팔을 뿌리쳤다.
“한세경!”
그가 소리쳤다. 세경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공연기획학과 졸업생. 혈액형은 독한 A형, 호텔 레스토랑보다 분식집이 친한, 5센티미터 이상 높은 구두는 멀미나서 못 신는 촌스러운 여자. 흐리멍덩한 하늘색을 좋아하고, 촌발 날리는 원피스를 입고 음대 정기연주회에서 성질 더러운 남자를 만난, 그 자식에게서 비 오는 날 길바닥에 버려진 운 더럽게 없는 여자. 너 맞지?”
물건 검수 절차처럼 냉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pp.18-19
세경은 벽에 걸린 웨딩드레스를 올려다보았다. 웨딩드레스 인생 중 최악일 것이다. 그래도 장인한테서 태어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웨딩드레스인데 식장에도 못 들어가 보고 땀에 젖어 달리다 벽에 걸렸으니. 그런데, 이것도 징조의 일부였을까? 주문과 다른 웨딩드레스가 결혼식 전날 도착했다. 이탈리아로 전화해서 확인해봐야 하는데 다른 고민을 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연락처도 효인에게 있어서 물을 수가 없다. 그러니 이젠, 될 대로 되라다. ---p.20
“그러는 너는 부자라 부자랑 결혼하려고 했어? 사는 거 보니 토끼랑 이웃일 뿐이던데?”
그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양배추 먹은 게 엄청 손해 본 기분인 모양이다.
“그냥 궁금했어요. 내가 사는 세상 말고 다른 세상 사람들은 어떤가, 상상하게 돼서…….”
“상상은 좋은데 단정은 짓지 마. 모두가 하나같이 너 같은 고민만 하고 살지 않으니까. 결혼식장에서 뛰어나가고 싶어도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야.”
차갑게 말한 그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점점 궁금해지는 남자다, 저 남자.
세경은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p.175
세경은 무릎에 올려놓았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윤의 말에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 혼자, 내 간수하기도 벅찬데 남까지 생각하는 허세를 떨라구?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그렇죠! 그걸 누구보다 잘 아셔서 그렇게 혼자 잘나신 거겠죠. 그런 분이 결혼은 왜 한대요? 그냥 혼자 쭈욱 사시지?”
“누군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그럼 누가 시켜서 해요? 누가 결혼하면 돈이라도 준대요?”
순간 해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에 정통으로 돌을 맞은 것 같아 불쾌했다. 어제부터 이 여자, 아는지 모르는지 뼈 있는 말로 자신의 가슴을 팍팍 찌르고 있다.
“아저씨! 차 세워요!” ---p.208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억력이 둔감해지는 것은 신의 축복이다. 반대로,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더듬고 되새기는 것은 인간의 아메바적인 습성이다.
그날 하루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계를 시도 때도 없이 보는 것은. 그리고 그날 하루뿐이었다. 시계를 틈틈이 힐끔거리고 보는 것은. 대신 그 다음 날부터 달력을 보기 시작했다. 결혼식 하기 사흘 전이겠구나. 결혼식 하기 이틀 전이구나……. 한세경, 진짜 맛이 갔구나.
“미운 나이가 스물여덟이라더라. 이십 대 후반 딱 중간에 걸린 나이지. 스물일곱보단 늙었고, 스물아홉보다 어린. 이십 대 중반이라기엔 너무 먹었고, 이십 대 후반이라기엔 억울한. 그래서 사춘기 비슷한 소고집이 된대. 지 인생이 제일 고단하고, 정점인 줄 아는.”
---pp.427-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