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치사회주의 유령은 결코 그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그의 사고는 파시즘이라는 병원체에 스스로를 노출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러한 감염과 싸워 해독제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의 독해에 따르면, 1933년 이후 하이데거 저작은 전통적인 정설에 복귀함이 없이 그 바이러스를 능가하거나 퇴치하려는 투쟁의 연장이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거기에 다른 이유가 없다면) 오늘날 그의 작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보기에 우리 시대 문제의 핵심은─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전통적 세계관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모든 세계관은 여러 가지 점에서 휴머니스트적인 형이상학과 관련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물려받은 이데올로기들을 능가하는 어떤 길, 즉 파시즘으로 끝나지 않을 어떤 길을 닦을 수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고 근대의 시민들은 민족 또는 민족국가─주권적 권력의 실재를 함축하는 용어들─와 자주 동일시된다. (왕이나 군주에 의한) 구체적인 대의제의 소멸은 시민, 민족, 국가가 보편적 범주들의 위상을 떠맡게 되는 새로운 체제들의 등장을 불러온다고 르포르는 지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범주들 중의 어떤 것이 “실질적인 존재자들이나 실체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이라는 범주는 특히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세기 동안 민주주의는 시민 주권이나 시민적 의지의 표현을 보증할 수 있는 보통 선거권의 확립과 긴밀히 관련되었다. 그렇지만 시민 주권이 그 자체와 주권의 의지를 실현하는 사람들을 드러내는 것이 전제되는 바로 그 순간─총선에서─정확히 “시민은 사회생활이 발전하여 그저 통계치가 되는 모든 연결망으로부터 추상화된다.” 그래서 “수가 실질을 대신한다.” 시민들이 “정체성의 극”을 구성한다는 것을 용인한다 할지라도 그들 의지의 표현은 유권자의 표명 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결국 “시민”에 의한 통치는 본래 양가적이다. 비록 권력이 그들 이름으로 행사되고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그들을 끌어내려 할지라도, “시민들의 정체성은 잠재적인 것으로 남는다.”
하이데거의 논점은 전 지구적 통제라는 확연한 이슈를 뛰어넘어 사회적 통제, 따라서 사회적 정치적 형평의 문제에 폭넓게 적용할 수 있다. [……] 초기에 권리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방식은 투쟁이다. 하지만 일단 사회적 조건들이 안정되고 공고해지면, 권리는 “기득권”으로 교묘하게 넘어간다. 그런데 이 이행은 비특권 사회 계층이나 부랑자들에게 해를 끼친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형평과 정의의 논의는 그 효력을 발한다. 그는 논의에서 “현전함presencing”과 “잠시 머무름passing while”을 강조하는데, 이는 도래와 떠남, 과거와 미래라는 이중의 부재 사이에서 현전성이 향유하는 것이다. 현재의 권리가 잠시 머무는 것임에 유의하지 않으면 이 권리들은 특권, 즉 사회적 통제를 독점하고 과거와 미래의 세대들(또는 사회적 집단들)을 제쳐버리려는 시도로 악화될 수 있다. 흔히 기득권은 법체계의 축복을 향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통제에 대한 도전들은 불법적이거나 부정한 것으로 호되게 처벌받는다. 따라서 법치는 비록 근대 입헌적 통치의 주요한 업적이지만 (권리들의) 등가(等價) 수준에서 추상적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이는 반드시 변하는 사회 형평의 사회적 조건과 수요에 비추어 재해석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가 시대의 정치적 기류를 비판하고 있긴 해도, 횔덜린에 대한 자신의 몰두를 정치로부터의 단순한 은둔으로 기술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반대로 그의 강의들은 명백히 이러한 관심을 정치적 경로에 대한 과감한 변화의 신호를 보내는 일종의 반정치counter-politics로 묘사한다.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을 필요가 있다. “횔덜린이 시인 중의 시인이자 독일인들의 시인이라는 이렇게 어렵고 숨은 의미를 지닌 이래로, 그는 우리 민족 역사에서 아직 주도적인 힘이 되지 못했다. 그는 아직 이러한 힘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업에 기여하는 것이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이다─이 노선을 따라가려는 어느 누구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타자성을 향하면서 자기를 뛰어넘는 것은 분명 하이데거의 초기 저작에서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가운데 지속적으로 부상하는 관심사이다. [존재와 시간](1927)에서 그는 인간의 현존재를 자기충족적인 주체나 자아보다는 오히려 “세계-내-존재”, 즉 세계성 내에 긴밀하게 얽혀 있어 사물들이나 다른 인간들과 맞물리는 존재로 소개하였다. 위 책의 연구에 개괄된 것처럼, 타자성에 대한 가장 극적인 서막은 인간이 “죽음을-향한-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는 현존재 자체의 비존재적이고 구체적인 예견, 즉 모든 주관적인 관리의 시도를 무화하는 예견과 관련이 있다. 더욱이 필멸성의 자각을 통한 자기소외는 동등한 존재들의 차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정확히 결합한다. 하이데거가 관찰했던 것처럼, “넘어설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의 죽음 또한 현존재가 타자들의 “존재 가능성Seink?nnen”에 민감토록 한다. 하이데거는 몇 년 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자기구역의 퇴조를 추적했는데, 그 중심 주제는 무 또는 비존재이다.
헤벨에 관한 하이데거의 글은 우리 시대의 심각한 궁핍을 강조하지만 그 궁핍이 어떻게 또 누구에 의해서 충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별된 주제로 돌아와서 볼 때, 이 글은 헤벨의 저작으로부터 끌어모을 수 있고 도움이 될 만한 실마리와 이정표에 대해 우리 주의를 환기한다. 무엇보다 헤벨의 시를 안내하는 것은 진정한 우의(友誼)이다. 여기서 우의란 계몽적인 지식과 일상 경험 둘 다를 챙겨 적당히 지혜로운 지상의 인간 주거 양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헤벨의 중재 능력은 언어에 대한 그의 미묘하면서도 민감한 접근, 즉 상위문화와 하위문화, 표준어와 방언을 조정하려는 접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그의 [보석 상자]는 문화적 중재와 조정의 상위 지점에 있다. 하이데거가 관찰한 것처럼, [보석 상자]의 비밀은 헤벨이 “알레만족 방언의 표현 형식을 ‘상위’ 독일어로 통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러한 길은 사물의 존재양식─예컨대 하나의 용기가 되는 주전자의 존재양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열린다. 하지만 어떤 용기의 존재양식은 물이나 포도주 같은 내용물을 담는 물주전자의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그 담는 능력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대상화적 사유의 입장에서 이러한 능력은 물주전자의 단단한 구조, 그것의 측면과 밑바닥─하이데거가 여전히 물주전자의 사물성에 소외되어 있는 것으로서 거절하는 개념─에 존재한다. 우리가 물주전자에 물이나 포도주를 채울 때, 그 액체를 측면들 “사이에” 그리고 밑바닥 “위에”, 즉 새지 않으면서 물주전자가 지닐 수 있는 특징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이’와 ‘위’라는 구조적 특징들 사이에서 그 액체를 붓는다는 독해가 가능하다. 대상적 구조들을 뛰어넘어서 하이데거는 기세 좋게 실재로부터 부재로─그래서 기본적으로 공의 영역으로─도약한다.
('제8장 하이데거와 선불교: 니시타니를 기리며' 중에서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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