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때기에서 허락하지 않을 거야. 북성동 일대는 우리 구역이니까, 회장님 허락 없인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사장도 독립했다지만 회장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회장님이 부르면 만사를 제쳐놓고 올라온다니까. 조배가 독자적으로 일하려면 깔때기부터 설득해야 할 거야. 가망 없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왜 저 지랄인지 모르겠어. 정신 차리는 게 좋을 텐데 말야. 사장이 겉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진짜 무서운 사람이거든. 저렇게 까불다가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 너는 모른 척하고, 둘 사이에 관여하지 마. 괜히 끼어들면 피곤해져.” --- p.59
대학생이 되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학해서 대학교까지 들어간 기특한 놈, 우리 사회는 이런 미담을 좋아하지 않는가. 영민이 착실한 이미지를 쌓는 대가로 정혜는 거리를 방황해야 했고 어머니도 혼자서 빚을 갚으며 힘겹게 살아야 했다. 그리고 아직 3년을 더 고전분투해야 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유치한 생각 때문이었다. 올해 거치 기간이 끝나면 내년부터는 이자에 원금까지 상환해야 한다. 게다가 졸업 때까지 내야 할 등록금을 생각하자 어깨에 거대한 원목 더미를 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잠은 점점 더 달아났다. 시팔, 어떻게 되겠지. --- p.68~69
웃음이 나왔다. ‘시팔, 이렇게 좋은 날’이라니. 그래, 시팔 가자. 가자는데 못 갈 것도 없다. 영민은 액셀을 당겼다. 피닉스가 다시 한 번 굉음을 질러댔다. 백 미터 전방에 회색 콘크리트 벽이 보였다. 축항로 끝이었다. 흥분한 나머지 속력을 너무 내고 말았다. 급브레이크를 잡는다면 둘 다 아스팔트 위로 나가떨어질 것이다. 속력을 줄이면서 코너링을 해야 한다. 다해가 걱정됐다. 겁을 먹고 몸을 움직인다면 피닉스는 아스팔트 바닥에 깊은 상처를 내고 해체될 것이다. 물론 두 사람도 온전할 순 없었다. 다해를 믿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능한 범위에서 넓게 코너링을 했다. 영민은 다해 체중이 그대로 자신의 몸에 실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해가 그를 믿고 몸을 맡겨주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턴을 했다.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부활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 것만 같았다. --- p.89
“깔때기가 재개발되면 거기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건감?”
“소문으로야 아파트며 빌딩이며 해수 공원도 들어선다고 하는데, 당최 거기다가 뭘 그리 많이 짓는다는 건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 거기가 개발이 안 돼서 그렇지,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이야 어디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잖아. 재개발 이야기야 진작부터 있었던 거고. 그러기에 미리미리 대책을 세웠어야지.”
상구 할머니가 깔때기를 빠져나오지 못한 할아버지들을 타박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좋은 전망에 아파트 지으려고 우리를 쫓아버린다 이거구먼. 땅 주인이야 보상이라도 받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파트라도 한 채씩 주는 건감?”
“이 영감탱이가 돌았나, 누가 그 비싼 아파트를 공짜로 주겠어? 이주비나 주면 모를까.” --- p.121~122
“시팔, 삐딱하게만 듣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봐. 지금 우리 회장님이 업종 전환을 하려고 해. 약이나 팔고 포장이나 해주고, 그런 야바위꾼 같은 일로 언제 돈을 벌겠어. 송도, 청라, 이런 데가 개발되는 걸 보고 회장님이 느낀 바가 있는 거지. 여기는 우리 나와바리야. 회장님이 가지고 있는 땅도 엄청나다고. 시장 쪽은 상업지구로 변경된대. 그럼 거기에 다운타운 먹자골목 같은 유흥가가 들어설 거야. 완전히 황금 어장이 되는 거지. 우린 빌딩도 세우고 진정한 조폭으로 거듭나는 거야. 일본 야쿠자 같은 조직이 될 수 있다고. 너도 학교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여기서 나랑 같이 일하자. 이번 기회에 아주 새 출발 하자고. 약 배달같이 시시껄렁한 일은 중석이한테 넘기고.” --- p.144
“불상사는 없었어?”
인터넷에 떠다니는 철거 사진을 보면 화염병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준비가 완벽했거든. 경찰이 일차로 장벽을 쳐주고, 그 뒤를 용역애들이 막아줘서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었어. 2인 1조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안에 사람이 있나 살펴보고, 빈집이 확인되면, 바로 기사한테 무전 때리는 거야. 그러면 기사가 삽차를 몰고 와서 그냥 뭉개버리는 거지. 골목 하나 해치우는 데 30분도 안 걸렸어. 집이 허술해서 삽차로 쓰윽 미니까, 쭈르르 무너지더라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몰려왔을 텐데?”
“여기가 깔때기 아니냐? 전경하고 용역 애들이 입구를 꽉 막고 있으니까, 소리만 빽빽 지르지 한 발짝도 못 들어오더라고. 나중에 시의원하고 단체에서 쫓아왔지만 그때는 상황이 마무리된 상태라 길을 터주고 우린 싹 물러났지.” --- p.238
배달은 이제 자릴 잡았다. 수입도 좋았고, 사장하고도 잘 맞았다. 오랜만에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영민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 병 수발로 구겨진 종잇장 같은 인생을 살던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가 대학만 졸업하면 아무 걱정 없다고 했다. 믿는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신만 믿는다고 했다. 어머니 말대로 그동안 잘해왔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도 들어갔다. 하지만 더 이상 잘할 수 없었다. 다해를 생각하면 조배, 이 개새끼를 그냥 둘 수 없었다. --- p.267
스르렁, 스르렁. 삽날이 시멘트 바닥을 긁었다. 조배가 겁을 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영민은 삽을 들어 벽을 한 번 내리쳤다. 단단한 화강암에 부딪힌 삽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조배가 후닥닥 두 걸음 물러섰다. 후후후. 영민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삽날로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조배와의 간격을 좁혀갔다. 접지한 날 끝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는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조배가 겁먹기에 충분한 사운드였다. 단번에 요절내긴 아까웠다. 천천히 공포를 느껴야 한다. 다해를 위해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때까지 자신은 인내할 것이다. 골목의 폭이 점점 좁아졌다. 화강암 벽은 단단한 근육처럼 조배를 조여왔다. 조배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거센 파도가 골목 끝을 타고 넘어왔다. 막장에 다다랐다.
--- p.380~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