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9/20 조창완(chogaci@hitel.net)
난 아직도 문학개론 시간에 흔히 배웠던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신봉하고 있다. 그 구절은 '시경에 있는 3백편의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악함이 없다'는 말이다. 오랜 잡독 속에 나는 아직도 시란 문학장르 속에 있는 선함에 대한 나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 물론 이것은 훨더린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이란 세상일 가운데 가장 결백한 일'이란 말을 한 것을 보면 서양에서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더욱이 소설가치고, 나는 나는 이 세상의 선함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이를 못 보았으니, 이는 사실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에 내 머리속에 가장 큰 울림일 김종철씨의 글들을 읽었다. 그는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주로 평하는 문학평론가이자, 알아주는 환경운동가다. '운동가'란 말을 싫어할 것 같아서 조금 꺼려지지만 아무튼 그는 아름다운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을 발행하고 있다. 그의 글은 물론이고, 전번에 평을 쓴 그 잡지의 선집도 깊은 인상을 남겨줬다. 그 인상이 그리워 김교수가 내놓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삼인 간)을 사서 읽었다.
책의 전반적인 인상은 전번에 선집을 읽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 선집에 문학에 대한 김교수의 오랜 소신을 담아놓았다고 보면 쉬울 것 같다. 마음속에 울림이 있는 책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 나에게 기쁨을 준 이책은 조금은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김교수의 문학관과 사회관을 볼 수 있다. 그에게는 꼬장꼬장한 선비기질이 느껴진다.
아마 대학에 교과서가 있으면 실었으면 싶은 첫 글 '교양체험과 욕망의 교육'은 교양이 무엇이며, 무엇이 사람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거기에 환경이라는 거시적인 시점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짓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독점자본과 다국적 기업의 노예임을 면치 못하고, 그리하여 비극적인 파국을 모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라는 조금은 끔찍한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세 번째 글 '인간, 흙, 상상력'은 김교수의 과격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다. 그는 김용택 시인과 송기원 시인의 글을 평한 비평가 김명인과 시인 고은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두 사람(김명인, 고은)의 편벽된 시읽기를 비판한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경직된 사고를 갖고 시를 대하다 보니, 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교수가 지적한 것은 어찌보면 상당히 난해한 선상에 있는 글과 평문들이다. 김교수가 이들 두 사람은 지적한 것은 지나친 리얼리즘과 목적성이 제대로된 시 읽기를 막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그 시의 정신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가령 지나치게 교조화된 민중운동은 결국 민중운동의 본질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황희 정승은 아니지만 두 측의 말에는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 누가 옳냐고 묻는다면 김용택의 본령이 있는 자연이나 송기원의 본령이 있는 인간을 읽어낸 김종철 교수의 의견이 타당한 것이 아닌가 싶다. 거시적이어서 제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노동자의 시각에 철저히 서 있지 않다거나 투쟁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거나 하는데 진정한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총체적인 인간성의 구조에 대한 통찰이나 참다운 과학적 인식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닐까요'하는 물음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평론가 구모룡과의 대담글인 '시적 인간과 생명의 논리'에서 이루어지는 소설에 대한 매도는 타당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상당히 위험한 글로 읽혔다. 이들은 소설의 흥기와 지금의 경박성은 비춰볼 때, 특성상 장르가 소멸되고 영상등이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는 글이다. 반면에 시는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 단적인 예로 '현재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남미나 중동 지역, 혹은 동남아시아나 인도 등 요컨대 비서구 지역의 산업화가 덜 된 지역들에서 이야기 형태로 씌어진 소설들이 그나마 지금 소설 문학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란 근거를 내놓는다.
정말 그럴까. 제 3세계 문학이 소설 문학의 본질을 잘 지키고 있다는 말에는 대체로 공감한다. 하지만 잘 살펴보자 소설은 문학의 특성상 인간의 삶과 가까운 장르다. 반면에 시는 마음의 성정과 가깝다. 그런데 문학이 인간이 흘러가는 방향과 같이 간다는 것이 꼭 매도되어야할 것인가. 이 말을 도덕적으로 매도할 수 있지만, 그 매도에는 상당히 위험한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냉소나 무관심은 비판이나 딴지걸기보다 훨씬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시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장르다. 자연과도 가깝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시인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세상의 흐름을 시로 이끌어가기에 인간의 눈과 귀는 너무나 민첩하다는 것을 알면서 소설이나 영상에 냉소를 던지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며 김교수가 던지는 대안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구비문학 등 비문자화된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근거로 문자가 생기면서 인간이 고답적으로 바뀌었고, 문자 자체가 권력으로 등장해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비문학등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구비문학에 비중을 두는 것 보다는 통신언어 등에 비중을 두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지 않을까하는 삐닥한 생각도 한다.
책의 중반은 몇 문인의 시에 대한 분석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후 북한에 있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홀대받았던 이용악을 다루고 있다. 단순한 기교파 시인으로 머물거나 친일파로 탈바꿈하지 않은 이들로 이상, 백석, 이용악을 묶은 김교수는 이용악의 시가 자신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소박한 공동체적 삶에 근접한 시인으로 분석한다. '금강'의 시인 신동엽의 시를 도가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글도 눈에 띤다. 김교수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을 '무위'(無爲)라고 일컬은 도가의 기본정신을 재론하고 신동엽을 이런 정신에 급접한 시인으로 본다. 이밖에도 심호택 시인이나 이선관 시인에 대한 평들이 있다.
김교수가 외곬로 생각하는 것이 생태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그가 시를 고르거나 시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찌보면 '자가당착'이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관점에서 시를 인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평자로서 그런 자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 토를 달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