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사, 사람이잖아?”
사람. 선하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 심지어 그 사람은 사내였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어 보면 그는 그냥 잠든 게 분명했다. 술 냄새가 아찔할 정도로 풍겨 와 술에 취해 뻗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으니.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얼굴은 사내를 별로 만나 보지 못한 선하가 보기에도 상당히 준수했다. 매끈한 피부와 눈을 감고 있는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뚜렷하고 미려했다.
두려움과 설렘이 반반씩 섞여 심장이 두근두근 뛰던 찰나, 선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사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선하는 호기심 가득한 제 마음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집 담벼락에는 분명히 금줄이 쳐져 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집. 그리고 그녀의 집 밖으로는 황실 소유의 소나무가 빼곡히 둘러싸고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사내가 들어왔다. 행색을 보니 병사의 옷도 아니다. 소나무밭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있을 것인데, 어찌 들어온 것일까. 병사들의 경계가 허술했던 것일까.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저는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을 것이다.
그런 죽음은 사양이었다.
“어, 어쩌지?”
이 사내를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선하는 화로를 든 제 양손과 사내를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깨물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이 들자, 결심한 듯 발을 든 선하가 조심스레 그의 팔뚝을 툭툭 쳤다.
“헉!”
소심하게 신발 코로 건드렸을 뿐인데도 선하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사람과의 접촉에 흠칫, 몸을 떨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오래전 일이긴 했지만, 난경은 손으로 눌러도 푹신푹신하고 보드라운 감촉이었는데, 더 단단한 신발 코로 건드려도 뭔가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이었다.
신기한 느낌에 몇 번 더 쿡쿡 밟아 보았다. 그랬더니 미동도 하지 않던 사내의 몸이 꿈틀하는 게 보였다.
“……!”
선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혼자 부끄러워했다.
“정신 차려!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이 사람을 깨워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선하는 조금 더 세게 사내를 발로 찼다. 하지만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일단 이것부터 갖다 놓아야겠다.”
그렇게 선하가 몸을 돌릴 때였다.
턱.
“허억!”
선하는 정말 심장이 배 밑으로 아득하게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죽은 듯 잠든 사내가 갑자기 돌아서는 선하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게.
“놔, 놔주세…… 아악!”
용케 화로를 붙들고 있었던 선하는 사내가 그녀를 잡아당기자 발버둥을 치다가 그만 주욱 미끄러지고 말았다.
퍼억.
푹신한 눈밭이라고는 해도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팠다. 벌써 얼기 시작한 눈이 얼굴을 따갑게 찌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선하를 괴롭게 만든 것은 기껏 쥐고 있던 화로가 엎어져 숯이 눈밭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안 돼!”
힘껏 발을 차서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선하는 맨손으로 뜨거운 장작을 줍기 시작했다. 뜨거웠지만 뜨겁다는 걸 생각 못 할 만큼 다급했다.
선하는 겨울이 정말 끔찍했기 때문에 얼어서 터진 손보다는, 데여서 물집 잡힌 손이 더 나았다.
“……!”
그렇게 정신없이 숯을 줍던 선하가 소스라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툭.
선하의 손에 잡힌 숯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사내가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고 서늘한 눈으로 선하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이러세요?”
선하는 겁먹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아닌, 손끝으로 옮겨졌다.
‘뭐야, 이 여자? 제정신인가?’
숯을 맨손으로 잡는 여자라니, 무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낯선 사내가 한밤중에 들어왔는데 숯이나 챙기는 것을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물론, 이 시각에 민가의 담을 넘어 들어온 황제인 제가 더 문제긴 했다.
제 몸을 건드리는 불쾌한 감각에 무심코 붙잡은 것이 사람의 발목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늘고 여린 여인의 발목이라는 것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손을 놓았다. 그다음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기억의 잔상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펼쳐졌다.
변복하고 나도진의 집에 찾아간 다음 그가 사 주는 술을 함께 마신 것까지 기억이 났다. 술이 그리 센 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먹는 편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만취했다.
그러고 난 뒤에 웬 담벼락 앞에 홀로 서 있었는데, 금줄이 쳐진 것을 보고 울컥 화가 났다.
[황제인 내가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술김에 담을 넘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인데, 웬 정신 나간 여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저, 저기 이곳에는 어찌 오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 여긴 들어오시면 안 되는 곳입니다!”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라는 말이 무현은 거슬렀다.
‘데인 게 아프지 않아?’
이 여자는 손을 덴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저를 쫓아내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아픈 내색이 전혀 없지만, 작고 야윈 손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지 않나. 그깟 숯을 줍겠다고 허둥거리더니, 화상을 입은 사실도 모르고 있다.
“이 손 놓고, 나가 주세요.”
무현은 선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새빨갛게 데인 그녀의 손이 신경 쓰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 몽롱했다. 붉게 부어오른 손가락을 식혀 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제가 누구냐면……!”
그래서 그만 그녀의 손을 핥아 버리고 말았다. 잡은 손은 차가운데 손끝은 뜨거웠다. 분명 충동적인 행위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