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논리는 워쇼스키 형제의 히트작 '매트릭스'(1999)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한다. '매트릭스'에서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주변에서 보는 물질적 현실은 가상의 것이며, 우리 모두가 연결된 거대한 메가컴퓨터가 이 가상현실을 생성하고 조정한다. 주인공(키아누 리브스)은 ‘진짜 현실’에 눈을 뜨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불에 타 잔해만이 남은 황량한 풍경, 다름 아닌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시카고의 모습이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모르페우스)는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넨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뉴욕 시민들은 ‘실재의 사막’으로 인도되었다. 할리우드에 익숙해진 우리는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과 그 풍경을 보면서 대규모 재난 영화에서 본 숨 막히는 장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테러 공격이 얼마나 예기치 못한 큰 충격이었으며, 어떻게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결정적 참사가 있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충격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 환상 속에는 이 사건이 일어날 만한 장소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타이타닉호는 19세기 산업문명이 가진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9.11테러 공격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 pp.28~29
서구에 사는 우리가 착취하는 주인처럼 인식될지 몰라도, 사실 하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하인은 삶과 쾌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가 없지만(콜린 파월이 내건 사상자 없는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라), 가난한 무슬림 급진주의자들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태세인 주인들이다……. 그러나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 개념은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는 것은 ‘문명 간의 충돌’이라기보다 각 문명 ‘내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과 기독교의 역사를 간략히 비교해보면, 이슬람의 ‘인권 상황’이(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용어를 사용하자면) 기독교의 인권 상황보다 훨씬 더 낫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과거 이슬람은 기독교보다 다른 종교들에 대해 훨씬 관용적이었다. 중세에 서유럽에 사는 우리가 고대 그리스의 유산들을 다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아랍인들을 통해서였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실들이 오늘날의 테러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다루는 것이 이슬람 ‘그 자체’에 새겨진 어떤 특징이 아니라 근대 정치사회적 상황의 결과물이라는 점만은 확실히 보여준다.--- p.63
세계무역센터 공격으로 인해 우리는 이중의 협박이라는 유혹에 저항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만일 공격을 무조건 비난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제3세계 악의 공격을 받은 미국의 결백함이라는 뻔뻔스러운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반면 아랍 극단주의의보다 심층적인 정치사회적 대의에 관심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결국 당연한 벌을 받았다며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여기서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은 이런 대립 자체를 거부하고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성이라는 변증법적 범주에 기대야만 한다. 이 두 입장은 각각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둘 다 일면적이고 틀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확한 윤리적 자세를 채택할 수 있는 사례를 제시하기는커녕, 도덕적 추론의 한계와 마주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희생자들은 결백하고, 테러행위는 가증스러운 범죄다. 그러나 이 결백함 자체는 결백하지 않다. 오늘날의 전 세계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이런 ‘결백한’ 위치를 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허위 추상화이다. 보다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상의 충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계무역센터 공격이 싸워야 할 가치가 있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모든 것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할 수 있따. 무슬림과 다른 근본주의자들이 비난하는 퇴폐적인 서구의 생활방식은 여성 인권과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이 공격이 전 세계적 금융자본주의의 중심과 그 상징에 대한 공격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죄책감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타협안을 수반하는 게 결코 아니다(테러리스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미국인들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운운……). 요점은 오히려 두 입장이 정말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채택해야 할 입장은 한마디로, 테러리즘과 맞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확장하여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의 행위(일부)도 거기에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다.--- pp.74~75
말인들의 ‘탈형이상학적’인 생존주의적 입장은 결국, 핏기 없는 삶의 광경이 그런 삶 자체의 그림자처럼 지루하게 오래 지속되는 결과로 끝난다. 오늘날 드높아지는 사형제에 대한 거부의 목소리를, 우리는 이런 지평을 배경으로 삼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거부를 지탱하는 숨겨진 ‘생체정치’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그것에 기생하는 초월적 힘들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수호하려는 이들은 결국 ‘우리가 고통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지루하게 살아가게 될 관리된 세상’으로 귀결하게 된다. 그 공식적 목표인 ‘오래 사는 즐거운 삶’을 위해 모든 실제 쾌락이 금지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는 세상으로 말이다.
---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