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쓸 듯 카드를 네 앞으로 가지고 온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참가자들의 눈길이 카드의 뒤를 쫓는다. 네가 카드를 뒤집는 순간, 그들은 묘하게 변하는 네 표정을 주시할 것이다. 읽으려는 자들과 읽히지 않으려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카드에 무슨 무늬가 그려 있을지, 어떤 숫자가 적혀 있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아직이라 다행이고 아직이어서 두근거린다. 두근거릴 수 있어서 아직은 다행이다. --- p.17 오은, 〈8〉
‘Parts’(2003)에서는 어떤 남자와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작업들에서의 여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분한 니키 리이다. 그는 남녀의 관계 속에서 여성이 가지게 되는 정체성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교하게 설치한 무대 장치로 구현한다.Parts’에서 남자의 모습은 팔과 다리 등 얼굴 없이 신체의 일부만 드러내고 있다. 즉 같이 찍힌 커플 사진에서 남자의 모습은 가차 없이 잘려나가 있다. “‘Project’ 시리즈의 경우 사람들이 사회적 맥락 안에 속한 나의 모습을 보며 ‘니키 어딨어? 니키 어떻게 변했어’ 이걸 궁금해 했다. 그래서 반대로 보이게 해서 나를 궁금해 하게 만들고 싶었다. 먼저 이 남자는 누굴까? 왜 이런 신발을 신었을까? 이 남자는 왜 니키 얼굴을 만지고 있지? 이런 식으로 남자의 모습을 유추하면서 반대로 니키가 어떤 여자였을까를 추측할 수 있게 한 것이다.” --- p.27 서정임, 〈니키 리가 있었던 자리〉
8월 한가운데였는데 한겨울처럼 몸이 떨렸다. 파 한 단을 안고 힘없이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앉아 있었다. 웅크린 남편은 전차에서 본 아이처럼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남편은 고개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보는데, 당신의 눈물과 나의 눈물은 다르다고, 우리의 눈물은 같은 게 아니라고, 그들은 말없이 눈빛으로 그것을 알고, 침묵은 그들의 오랜 간격. 단어와 단어 사이. 언어와 언어 사이. 국경과 국경 사이. 식민과 피식민 사이. 항복과 해방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침묵은 그들이 처음 만난 히로시마 앞 바다의 집요한 파도처럼, 때로 서로를 밀어내고 서로를 당기는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 p.42 장혜령, 〈히로시마에서 온 여인〉
그것은 나쁜 얼굴이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오직 나쁜 눈, 나쁜 코, 나쁜 입으로만 이루어진 나쁜 얼굴이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어떤 모호성도, 어떤 이중성도, 어떤 이면의 얼굴도 가지지 못한 나쁜 얼굴이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저 자신 이해하지 못하는 나쁜 고통으로 찌부러진, 울부짖는, 침 흘리는 나쁜 얼굴이었다. 저 자신 제어하지 못하는 나쁜 주름으로 과잉된, 터질 것 같은, 빽빽한 나쁜 얼굴이었다. 나쁜 얼굴이 필요로 하는 모든 클리셰를 갖추어 하품이 나오도록 진부한, 납작해진, 딱딱해진 나쁜 얼굴이었다. 빨강 얼굴이었다. 한계로 가로막힌 얼굴이었다. 파괴 직전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내 얼굴이었다. 어째서일까. --- p.63 김효나 〈직전의 얼굴, 그리고 직후〉
실은 언제나 무섭습니다. ‘이 비극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 사진으로 뭘 증명할 수 있을까? 내 행위는 얼마나 정당할까? 이런 질문들에 답은커녕 변명할 말조차 별로 없어요. 그럼에도 비극 앞에 자꾸 서게 되는 건, 저도 그 비극의 그늘을 비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 역시 크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만 사진으로 어떤 비극을 온전하게 말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사진으로 내 생각을 다 전달할 수는 없다는 당신의 말 또한 통감합니다. 제가 무엇을 보고 어떤 의미를 찾았다 해도, 다 전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사진들은비극을 소비하는 도구에 그칠 수도, 무심한 풍경으로 남을 수도, 무용한 채로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 p.96 윤성희, 〈그래도 그 사람은 오지 않는다〉
왜 사진을 다루는 예술가는 자신과 자신의 인연과 자신의 이미지와 인연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는가. 사진이 손상된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이 예술가 자신의 상처와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상처에 안일한 긍정을 덧대는 바느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나와 당신은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봉합을 봉합하는 바느질을 행하고 있는 중이다. 나와 당신은 지금 졸타우 본인의 이미지를 꿰맨 얼굴을 다시 보고 있다. 우리는 얼굴의 관람이 우리가 틀어 앉고 싶은 동굴을 관람 중이진 않은가 의심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실천은 하나다. 그 동굴에서 나와 입구를 꿰매버리는 것이다. 다행히(?) 아직 이 작품은 현재 진행형이다. 졸타우는 본인이 죽어 사망 증명이 기록으로 남는 순간, 자신의 딸이 프로젝트를 계속해주길 희망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나는 졸타우의 딸이 되는 순간을 상상한다. 우리가 과신하는 얼굴이라는 동굴을 꿰매기 위해.
--- p.158 김신식 〈동굴을 꿰매다, 사진과 바느질의 관계에 대한 단상〉
초기의 초상사진이 가졌던 미신과도 같은 힘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진들은 거래의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기복의 의미를 내재한 초상들은 가족과 연인을 위해 제작 및 공유되고,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셀프 포트레이트들이 주머니 속의 앨범에 부적처럼 저장된다. 인류가 신화와 신앙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이 사진들은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초창기 초상사진이 발휘했던 미신적인 권능은 각 시대의 사회기술적 기반에 따라 명멸하는 일시적인 기조가 아니라 초상사진이라는 장르가 내재한 근본적인 힘이라 하겠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혼자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나를 찍을 때, 우리는 신과 함께 있다. --- p.164 최원호, 〈세상에서 가장 작은 신과 함께〉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다운 사진으로 찍어내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멈췄던 적이 없다. 19세기의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은 얼굴에 하얀 에나멜 페인트를 칠하고 눈썹에는 검은 가루를 발랐다. 평소에 화장을 하지 않던 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사진가 헨리 피치 로빈슨은 마치 ‘판토마임 광대처럼’ 얼굴과 머리에 파우더를 바르는 고객들의 끔찍한 몰골을 개탄했다. 분장술로도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은 칼과 붓, 청산가리 용액과 물감으로 사진을 수정했다. 사진 속의 얼굴이 마음에 들 때까지 사진을 바꾸고 또 바꾼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인간들보다 더욱 극단적으로 증강된 자기 신체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남긴다. 도구만 디지털 카메라와 포토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인스타그램을 채우는 셀프 사진들의 풍경은 기묘하다. 눈은 비정상적으로 크고 피부는 마치 인형처럼 깨끗하다. 도저히 입냄새나 체취를 풍기는 인간의 육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우리는 흥미롭게도, 이런 사진들에 아름다움과 욕망을 느끼는 존재다. --- p.171 김현호,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까지〉
스마트폰 등장 이후,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생성해주는 ‘사진기’를 넘어 컴퓨터의 시각기관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과 결합한 카메라는 스스로 프레임 안에 무엇이 있는지 판단하고, 이에 따라 초점을 맞춘다. 나아가 배경을 흐리게 하거나 피부의 잡티를 없애주는 등 실시간으로‘후보정’을 실행한다. 또 사용자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전후 이미지까지 스스로 저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두뇌를 가지게 된 카메라에게 인간이 부여한 임무는 카메라 스스로 피사체를 인식/판별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진 발명 이후 가장 오랫동안 식별의 대상이었던 얼굴은 피사체 인식 기술의 최우선 목표가 됐다. --- p.177 이기원, 〈내 얼굴을 증명하는 법, 사진에서 페이스ID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행위는 흔히 권력 의지와 동일시된다. 이때 본다는 것은 일종의 사냥과 같다. 프랑스의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가 새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총 모양의 연속 사진기를 제작한 것은 사진의 역사에서 유명한 일화다. 전명은은 조각에서 사진으로 전공을 바꾼 후에 마레의 사진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그러나 전명은의 안내인으로서 마레는 단순히 공간을 꿰뚫으며 트로피를 모으는 사냥꾼이 아니다. 마레는 움직이는 것의 시간을 거듭 쪼개고 펼쳐서 아직 인간의 시선과 마주친 적 없는 이미지를 길어올렸다. 그것은 멀리 들어가는 길도 깊이 들어가는 길도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다. 그 길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안식을 허용하지 않으나 언제나 길 위에 있다는 기쁨을 준다. --- p.201 윤원화, 〈전명은: 팽이를 쳐다보는 아이〉
책은 인쇄를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매체라는 점이 좋다. 웹처럼 계속 고치고 업데이트할 수 없다는 긴장감을 지닌 채로 수없이 많은 변수와 경우의 수 속에서 확신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선택이 모여서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책이라는 사물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 책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저 내가 맞다고 믿었던 선택을 반영하고 있는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완전한 책을 상상하고 기대하며 다시, 다시, 다시 만든다. 매번 똑같지만 다른 ‘책’이라는 사물을 만들고 있는데, 계속 어떤 지점에 닿지 못하는 느낌이다.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과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을 동시에 안고 다시 책을 만든다.
--- p.242 박연주,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