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해놓고, 삶의 터전을 버리게 해놓고, 배와 그물을 버리게 하고, 직업을 버리게 하고서 하는 말이 너희는 나를 따를 수 없단다. 그리고 제자들이 따르던 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버린다. 어떻게든 살아서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애초부터 부른 목적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죽음은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을 배반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 아닌가. - 중략 - 따라서 ‘나를 따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 p. 16
2.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로 번역된 성서의 많은 문장들은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다. 로마서 3장 22절에서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다. 성서학자들은 목적의 의미가 있는 목적속격이라는 문법을 만들어 소유격을 목적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를 펼치지만, 그것은 참뜻을 곡해하는 주장이다. 명백한 오역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 24
3. 기독교는 이 점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정하고 또 부정한 그 겉의 예수를 믿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예수는 다른 예수가 되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그 ‘예수’, 그 ‘나’는 거세되어버린 채, 다른 예수, 육체대로의 예수만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여기 비극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예수를 상실한 것이다.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예수, 버러지 예수, 세상 임금 예수만을 고집하며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니 그 예수는 공중에 매달아야 할 사탄이 되었다.
--- p. 43
4. 성경의 핵심사상은 ‘부활’이다. 종말론은 부활을 거세시킨다. 온통 부활이라는 말로 치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성경의 핵심인 부활을 실종시킨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에 갇힌 무덤 속에 죽어 있는 ‘나사로’가 다시 사는 것이다. 선악의 무덤에 갇혀 있는 존재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다. 무덤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살아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덤문은 굳게 닫아놓은 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부활을 거세시키고 있으니 종말론의 페스트가 얼마나 지독한 질병인지 알 수 있을까? 마르다 역시‘엔 테 에스카테 헤메라(마지막 날에)’라는 말은 사용하지만 잘못된 ‘종말론’에 감염되어 있는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 p. 62
5. 성서의 인간이해를 원죄론의 틀로 바라보는 관점은 성서의 본질과 터무니없이 다르다. 더구나 아담의 죄가 마치 유전되어 인류의 죄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어서 내 이가 시다”는 유대 속담의 복사판이 아닌가.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다면 마땅히 예수의 의도 유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담의 죄는 누구나에게 유전되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지만, 예수의 의는 유전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수를 믿는 사람만 의롭다함을 입는다고 ‘칭의론’은 말한다. 아담의 죄의 유전자적 DNA는 강력하고 예수의 의는 아담의 DNA보다 유전인자가 약하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도 궁색하다.
--- pp. 69-70
6. 역사적 시간의 삶은 죽음을 향하여 있지만 존재적 시간은 ‘사랑과 거룩’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수많은 존재적 원형들이 있고 우리의 정신이 끊임없이 새로운 유형으로 이행하려는 것은 마침내 사랑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함이다. 정신은 사랑과 거룩을 지향한다. 영원한 아가페를 향하여 항해하는 다양한 형태의 시간 여행이다.
--- p. 95
7. 성경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은 하나의 거대한 기호체계다. 서로 주고받는 사인이다. 그 기호는 관계성에서 형성된다. 기호는 어느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주고받는 해석의 체계가 판이해 질 수 있다. 하나의 돌멩이를 해석하고 의미를 찾음에 있어서도 조각가의 그것과 건축가의 그것과 광물을 분석하는 연구원의 그것과 보석상인의 그것이 다르다. 서 있는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다른 것이다.
--- p. 103
8. 성경에는 이와 같은 예수의 화법이 종종 나타난다. 인생은 수가성 여인의 삶과 같다. 인생은 목마름이다. 인생은 갈증이다. 목마름은 인생의 실존이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인생들은 수많은 남편을 영접한다.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이 필요하듯 인생은 일생 동안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처녀에게 자궁이 있듯, 우리의 마음에도 자궁이 있다. 정신의 세계에도 씨 뿌림을 받고, 씨가 발아하여 새로운 정신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새로운 나를 낳고 싶은 본능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나를 낳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정신의 세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와 깨달음을 찾아 씨를 받고자 하는 성적 욕망이 있다. 자신의 정신적 성감대를 자극하고 깨달음의 씨를 뿌려줄 남편을 찾아 헐떡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인생이다. 노자, 공자, 맹자, 붓다, 크리슈나무르티 … 등등.
--- p. 124
9. 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에게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진리의 물음은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법정에서 진술하듯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리에 대한 물음은 그렇게 경박하게 묻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묵묵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빌라도의 마음의 태가 씨를 받아 수태를 준비하고 있기보다는 경도중의 여인과 같이 이미 피를 밖으로 흘리고 있는 것과 방불하기에 거기서 진리를 발설할 수가 없었다. 그곳은 진리의 씨가 흘러나올 곳이 아니다.
--- p. 136
10. 뱀의 형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으뜸되는 가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이 지식의 나무를 통해 선악을 판단한다. 에덴에서 하와와 아담을 꾄 뱀은 그 같은 인간의 실상을 설명해 주는 성경의 논법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라고 한다. 이때, 그것이 기록되는 종이는 기억력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억 창고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기록하느냐가 힘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곳은 표면이다. 표면의 기록을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존재의 세계가 곧 돌비의 세계다. 가이사의 것으로 존재하는, 가이사의 형상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값어치를 기록하고 자신의 값을 결정한다.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수많은 깨달음과 지식’을 수집하려 한다. 정보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아우성친다. 그 지식을 기반으로 타인과 관계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형성하며 가이사의 질서를 이루어간다.
--- p. 154
1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생동안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온갖 시도를 행한다. 그 시절이 아브라함 이전의 아브람 때이다. 아브람의 일생은 어떻게 인생과 하나님의 평행선이 계속되는가를 가르쳐준다. 마침내 하나님이 평행선을 깨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뀐 때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곧 두 이름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방식. 소유의식에서 존재의식으로의 이행 방식. 평행선이 깨진다함은 하나님이 항복을 하던지 아브람이 항복하던지 둘 중 하나가 두 손을 들어야 한다. 아브람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상징이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것을 내어던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상징이다.
--- p. 170
12. 처음 사람은 지식을 중심으로 심판의 칼을 휘두르는 게 특징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간다. 단지파가 기둥으로 참여하는 이유다. 단 지파는‘심판’을 의미한다. 동시에 에브라임 지파의 상징성은‘수고한 땅에서 창성케 한다.’는 에브라임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지상가치가 소유에 있고 번성에 있다. 지식은 심판을 낳고 힘을 배양해서 궁극적으로‘번성’에 방점을 찍는다. 마음은 그렇게 형성되고 구조화된다.
--- p. 231
13.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두 종류의 남신이라면 하갈과 사라는 두 종류의 여신이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두 종류의 로고스라면 하갈과 사라는 두 종류의 태요, 두 종류의 예루살렘이다.
--- p. 277
14. 바울은 말한다. 창세전에 모태로부터 구분되었노라고. 새 언약의 성취는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향하고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향하는 것에 있다. 이 둘은 사라의 태에서 태어남으로 가능하다. 새 언약의 성취는 하갈의 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라의 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이것은 씨뿌리기 전, 곧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진설되어 있는 떡 곧 진설병이다.
--- p.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