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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메리지쿠스

호모 메리지쿠스

: 결혼하는 인간

여해 | 가하 | 2011년 11월 1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6.0 리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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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1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416g | 128*188*30mm
ISBN13 9788966470914
ISBN10 896647091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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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의까지 중간에 시간이 남아서 잠깐 약혼녀 얼굴을 보러 부랴부랴 달려왔죠. 내일은 충주를 거쳐 김천에 가야 하니까 같이 예습복습도 할 겸.”
약혼녀라니.
진짜 결혼도 아닌데 이건 부담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정감이 묻어나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러지 말라고 톡 쏘아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수 씨.”
나지막한 부름. 남자의 목소리에 스며든 은은한 기운이 내 몸을 자극한다. 결계가 쳐진 것처럼 거리의 소음이 아득히 사라진다.
세상에 윤유호라는 남자와 나, 단둘이 남아버린 것 같은 응축된 감각. 그와 나를 중심으로 사방 1미터 안의 기압이 급상승한다. 호흡이 곤란하다. 이유 모를 긴장감과 기대의 이율배반에 등이 오그라든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그와 나를 둘러싼 기운의 무게감에 어깨가 저릿하다.
알고 있다. 이것은 긴장감이다.
서로에게 어느새 감정적으로 깊은 호감을 가진 남녀 간에만 통하는 섹슈얼한 긴장감. 육체적인 화학반응의 전조.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이성이 빨간 경고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린다. 위험하다. 이건 위험하다. 최소 세 걸음 이상 떨어질 것. 좌로 2미터 이동. 뒤로 2미터 이동. 그의 손이, 그의 팔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서라.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가위에 눌린 거 같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내 무언의 허락을 근거로 남자의 몸이 반걸음 가까이 다가온다. 남자의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금 더 큰 폭으로 대담하게 움직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가다듬어 귀 뒤로 넘기고, 코트 주름을 매만지며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본다. 나를,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어둡게 반짝인다. 이전에도 비슷한 눈빛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이것은 예전에 사귄 남자들이 내재된 육체적 열망을 드러낼 때와 유사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윤유호라는 남자의 것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영적 에너지가 숨어 있다. 뭔가를 간절히 바라고 순수하게 소망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이.
“지수 씨.”
내 이름을 부르는 윤유호의 목소리에 미세한 바이브레이션이 어려 있다. 문득 두려워진다. 이 남자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그만 떨쳐버려야 한다. 그의 말에서, 그의 손에서, 그의 눈에서, 그의 몸과 마음에서 새어나오는 미묘한 파장을.
부서뜨려야 한다. 이 글그렁거리는 마음을. 의외의 시간과 장소에서 그와 부딪치자마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내 마음을.
“지수 씨. 지금 시간 있으면 우리……”
있는 힘을 다해 그를 향해 한마디 내지른다.
“섹스나 하자구요?”
미쳤구나, 박지수. 하필 왜 이런 말을!
“같이 저녁식사하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섹스라. 그것도 괜찮네요.”
남자의 목소리엔 웃음이 짙게 깔려 있다. 분위기를 깨려는 내 시도는 좋았다. 덕택에 확실하게 깨졌다. 문제는 지나치게 오버했다는 거다.
가벼운 농담을 해야 할 순간인데, 하고 많은 말 중에 하필 내놓고 섹스를 들먹이다니. 엎질러진 물이다. 어설픈 변명이나 핑계를 대는 건 너무 우습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딱 하나, 눈앞의 남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거다.
“내가 유호 씨한테 이골이 나서 그래요. 처음 만났을 때도 다짜고짜 하자고 하고.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내가 질려서 그러잖아요.”
빈약한 투덜거림이 통했을까? 저절로 그의 눈치를 본다. 윤유호라는 남자가 슬쩍 웃는다. 조금 전의 에너지는 오간 데 없이, 그의 눈빛엔 반지르르한 기름기가 감돈다. 바람둥이 기운이 강림하셨다는 징조다.
“그 말은 한 번밖에 안 했는데.”
통했구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그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음흉하게, 그러나 가볍게 툭 내뱉는다.
“땡겨요?”
이 사람은 늘 이렇다. 장난처럼 섹스를 이야기하는 사람. 쉽게 말하고, 쉽게 유혹하고, 아니면 말고. 원래 그런 남자다. 이미 잘 알고 있다. 여자와 섹스에 쉬운 이 사람을 대할 때 형체 없는 관념이나 감정에 흔들리는 건 주책없는 짓이다.
“원해요?”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감돈다. 그러나 눈은 이미 웃고 있지 않다. 바람둥이 특유의 기름기가 걷혀져 있고, 대신 남자의 목소리에 다시 작은 진동이 어린다.
아니, 아니다. 떨고 있는 것은 나다. 내 귀가, 내 몸이, 내 마음이 떨고 있다. 여기에서 멈추라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목이 잠긴다.
“할까요?”
그가 제안한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지나간다. 1초, 2초, 3초, 4초, 5초.
“……하죠.”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걷혀버린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 손을 뻗는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한다.
“식사 말이에?.”
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깐 흔들린다. 그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을 뻗어 태연하게 앞을 가리키며 얼른 가자는 시늉을 한다. 무엇을 먹는 게 좋겠느냐며 그가 활달한 어조로 논의를 청한다. 가슴에 얹힌 체증이 세포분열을 일으킨다.
의견을 받고 싶다. 내가 이 사람과의 계약을 손해 안 보고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누군가에게는 목적인 남편과의 잠자리가 쏙 빠진 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놈의 결혼, 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리고 하나 더 알고 싶다.
만약 내가 하자는 게 식사가 아니었다면 그의 손은 어디로 갔을까?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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