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법에 밝으려면 네 가지로 관찰하세.
네 가지가 무엇인가?
몸에 대해 몸을 보고, 느낌 대해 느낌 보고
마음 대해 마음 보고, 법에 대해 법을 보세.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 하세.
이 게송은 앞의 게송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서 설명하기 위해 제가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네 가지 대면관찰[四念處]의 수행입니다. 이건 누구나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수행법입니다. 살다 보면 가정에서 모임에서 직장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마다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고 사라지지요. 운전하다가 성질이 나면 ‘이런, 달마(별명)가 화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관찰하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요즘 ‘달마(達磨)’라는 닉네임을 붙여서 말합니다. 달마가 원래 법(法)이라는 뜻이거든요. 기분이 좋아지면 ‘달마가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기분이 나빠지면 ‘달마가 지금 기분이 나쁘구나.’ 하고 관찰합니다.
--- p. 52
“세존이시여, 저희 사꺄족들은 교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사꺄족들의 교만이 제거될 것입니다.”
- 『율장』 「소품」
백팔배나 삼천배 등 절을 통해 하심이 좀 되면 일심(一心), 즉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공부를 합니다. 기도가 대표적인 일심 공부입니다. 천수다라니나 「화엄경 약찬게」 등을 앉으나 서나 계속 독송합니다. 일심이 되면 무심(無心), 곧 한 마음조차 사라진 상태인 무분별심을 공부합니다. 참선이 대표적인 무심 공부입니다. ‘아, 이 몸과 마음이 진짜가 아니구나.’ 하는 무심을 맛보고 나서는 발심(發心), 즉 전법을 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공부는 하심에서 시작해 일심, 무심, 발심으로 이르는 네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하심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인 일심이나 무심 혹은 발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대로 마음공부하려는 분들은 먼저 하심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 p. 119
지혜는 수행에서 생기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지혜가 줄어든다.
지혜를 얻거나 잃는 두 길을 잘 알고
지혜를 키우기 위해 힘써 노력하라.
- 『법구경』 282
여러분이 절에 다니는 건 마음공부하고 보시하여 복덕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여러분을 행복으로 이끄는 지렛대입니다. 내가 염하는 소리를 들어야 일심이 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무심으로 들어가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심 공부는 견성(見性), 즉 자기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명상이 몸과 마음을 보는 것이라면 참선(무심)은 몸과 마음을 보는 ‘관찰자,’ 즉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 점이 명상과 참선의 차이입니다.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열심히 하면 됩니다. 앉으나서나 오나가나 자나 깨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것입니다.
--- p. 266
여기 어떤 사람이 … 자기만 공양 올리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 않으면
미래생에 재복은 있을지언정 인복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공양 올리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올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미래생에 인복은 있을지언정 재복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도 공양 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미래생에 재복도 인복도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도 공양 올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한다.
그런 사람은 재복과 인복을 동시에 받는다.
- 『담마빠다 아타까타』
마하둑가따(mah?duggata)는 매우 가난한 자, 즉 ‘극빈자’를 뜻합니다. 하루 벌어서 겨우 하루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사는 마을의 촌장이 어느 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게송이지요. 자신이 보시를 하면 재복이 생기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해서 보시를 하게 하면 인복이 생기니, 재복과 인복을 모두 가지고 싶다면 자신도 보시를 하고 남에게도 권해서 보시하게 하라는 가르침이지요. 재복과 인복을 모두 갖추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복덕’입니다. 복덕은 복과 덕을 함께 갖추는 것인데 그러고 싶다면 자신도 보시하고 남에게도 권해서 보시하게 하면 됩니다.
--- p. 377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수백 편의 게송을 읊어 주는 것보다
들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한 구절의 법문을 해 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전쟁터에서 백만 명을 정복한 것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
더 위대한 승리자이다.
- 『법구경』 102, 103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만 수천의 글보다 비록 한 구절 짧은 글귀라도 생사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앞으로 읽고 뒤로 읽으며 모두 욀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쭐라빤타까는 ‘라조 하라낭,’ 즉 ‘때를 닦자’ 한 구절만 외면서도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 pp. 394~395
죽음은 목동의 막대기와 같아서
태어남을 늙음으로 몰고
늙음을 병듦으로 몰고
병듦을 죽음으로 몰고 가서
마침내 도끼로 자르듯이 생명을 끊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다시 태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 『담마빠다 아타까타』
소 치는 아이가
막대기로 소떼를 몰고 풀밭으로 가듯이
늙음과 죽음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간다.
- 『법구경』 135
사람들 대부분이 ‘복된 윤회’를 바랍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뭅니다. 복된 윤회를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입니다. 지은 복이 다하면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복은 아무리 구해도 영원히 복과 즐거움만 누리고 살지 못합니다. 윤회하는 존재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도를 닦아야 합니다. 마음에 대한 애착이 쉬어야 윤회에서 벗어납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애착을 점점 키우면 윤회가 길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복음(福音)과 도음(道音), 둘 다 이야기합니다. 반면 다른 종교에서는 복음만 이야기합니다. 복된 윤회를 보장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넘어 도음을 얻으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깨어야 합니다.
--- pp. 4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