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 레코딩에는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었다. 철학이란 결국 이성의 빛을 뻗어 객관적이고 항구적인 진실에 다가감으로써 혼돈과 편견을 지우고 우리 자신과 세상의 기저에 깔린 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들을 둘러싸고 있던 민낯의 돌덩어리 같은 진실일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핑크 플로이드는 소용돌이 같은 1960년대의 무정형 사이키델리아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접근 방식은 무언가 달라졌다. 이전보다 더 체계적으로 변했고 미니멀해졌다. 페이즐리를 연상케 했던 음악적 허세와 변덕스런 실험은 현실의 근본적 층위(존재, 시간, 유한성), 경제학(돈), 현대 심리학(편견, 공포, 광기)에 더 날카롭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 p.19~21
그가 나를 위해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틀어주었던 날, 우리는 그의 집에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다 일하러 가셨고 집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우리는 음악 볼륨을 크게 높였다. 어렴풋한 형광빛이 지하의 여성용 침실 컴컴한 벽에 붙은 검은 포스터를 비추었고 이미지는 물결치는 듯 보였다. 열여섯 살 소녀였던 나는 죽음이나 광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포스터를 노려보며 어서 이 음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마 그게 둘이 함께 보낸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깨졌으니까. 나는 내키지도 않았으면서 그와 섹스했던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우리는 몇 년 동안 친구로 잘 지냈다. 궁금하다. 왜 《The Dark Seid of the Moon》과 친숙한 우리 모두는 그 음반을 처음 들었던 그 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걸까?
--- p.57~58
워터스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가사를 쓸 때 자신의 관심사가 “정치적이고도 철학적”인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앨범을 구상하면서 “우리를 긍정적인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억제하는 억압과 집착 이를테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 더 빨리 비행해야 한다는 시간에 대한 압박, 교회나 정치와 같은 조직화된 권력 구조, 폭력, 공격성”을 소재로 삼았다. 그게 이 앨범 대부분이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이유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들 그리고 소외를 만드는 다양한 스트레스들과 극복해야 할 장애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워터스는 이 앨범을 통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사실 그는 이 음반을 “긍정적인 것을 포용하고 부정적인 것을 거부하라는 간곡한 권고”라고 말했다. 그가 바라보기에 삶이란 이런 것이다.
삶이란 리허설이 아니에요. 우리가 아는 한,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지요.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도덕적, 철학적, 정치적 입장에 근거해 선택해야 합니다. (…) 일생 동안 선택할 수 있지요. 그 선택들은 정치적인 고려, 돈, 우리가 가진 본성의 모든 어두운 면에 영향받습니다. 당신은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을 밝거나 어둡게 할 기회를 얻지요. 우리는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성향을 초월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그림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니까요.
--- p.143
아도르노에게 문제는 비단 미학적인 것만이 아니다. 넓게 보아, 그것은 사회―정치적 문제의 징후다. 이러한 구조화된 표준화를 거치며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작품은 청자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대중음악이 청자의 자발성을 박탈해 조건화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구조화된 표준화는 청자들에게 상업적 음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도록,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난 그 어떤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도록 이끈다. 음악 산업은 상업적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음악을 유통하지 않을 것이고, 청자들의 지평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업적 음악은 여가 시간을 때우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의 전달을 약속한다. 바로 참신함과 “더 이상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휴식”이다. 대중음악은 사람들에게 그 두 가지를 제공한다. 표준화된 구조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동안, 개별적 특성들은 참신함을 약속한다. 외견상으로 이런 개별적 대체 화음이나 음색 같은 것들은 특정 뮤지션, 가수, 혹은 밴드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런 것들을 ‘유사―개별적인pseudo-individual’ 것이라고 불렀다. (중략)
아도르노의 글이 발표된 지 34년쯤 후, 로저 워터스가 음악 산업을 직접 비판한 대목을 보자. “무슨 꿈을 꾸었니? 괜찮아, 우리가 무슨 꿈을 꿔야 하는지 말해주었잖니.what did you dream? it’s alright, we told you what to dream”.
--- p.196~197
[Interstellar Overdrive]의 긴 중간 부분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곧바로 연상시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둘의 기술적인 특징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 두 곡은 모두 꺼져버릴 것 같은 불안정한 주제, 파편적인 코드 진행으로 감싼, 짤막한 멜로디―리듬 오스티나토로 정의되는 서로 별개의 ‘구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구간은 갑작스럽게 전혀 다른 박자, 음색, 질감의 다른 구간으로 이동한다.
사이키델릭 록 [Interstellar Overdrive]로 보여주고자 했던 핑크 플로이드의 목표는 현대사회의 소외의 결과로 부식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려는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적 퇴행과 유사한 것인가? 아마 그 대답은 “그렇다”일 수 있다. [Interstellar Overdrive]의 구조적 역학은 자아의 소멸을 암시하며, 원시주의 시기 ‘주요 테마’들의 뻔한 재현을 싫어하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보다 더 분명히 테마들의 반복과 재통합을 주장한다. [Interstellar Overdrive]는 딱 보아도 이상한 테마로 시작한다. 아마 ‘자아’를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고 난 후, 음악의 텍스처는 다양한 소멸의 층위에 따라 달라지다가 ‘저 멀리’서 완전히 소멸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6분 15초가 되면 강한 리듬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 지점은 자아가 완전히 죽어 집단 속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걸까?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는 도입부의 재현. 이것은 긴 여정을 경험한 자아가 더 현명하고 농익은 모습으로 다시 출현한다는 것을 뜻하는 걸까? [Interstellar Overdrive]의 구조적 궤적은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환각 경험을 묘사한다. 그것은 순수하게 개인적이고도 고독하며 종종 놀라움을 주는 소외의 경험이자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오늘 밤 런던에서 모두 사랑을 나누자」에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자아 해체 신호로 그 한계에서 벗어나 더 거대한 집단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Interstellar Overdrive]의 음악적 구조는 소외를 그려낸 것이고, 동시에 그 해결책을 보여준 것이다.
--- p.208~209
광기의 철학자라 불린 니체는 저 유명한 금언을 남겼다. “신은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뒤에 딸린 말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부버에 따르면 서양철학의 하나인 계몽 이론이 지닌 문제는 세계를 새롭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신의 지위를 깎아내린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철학자들은 신을 합리성의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추상적 원리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신은 인간을 닮은 모든 특성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그와 인간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상실했다. 만약 신이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존재한다면, 그는 단지 사물이자, 인간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의 방식으로 신과 관계하게 될 것이다. 부버에 따르면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점에 관해서는 옳았다. 사실 신은 유의미한 방식으로는 살아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버는 종교적 믿음을 나약함의 징후로 간주하는 니체의 무신론을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부버는 종교적 믿음이 만남의 방식을 통해 획득되고, 현대사회가 인간 사이에 초래한 소외에 대해 발전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p.233~234
디오니소스는 “한계를 위반하려고 하는 충동, 경계의 해체, 개별성의 파괴, 그리고 잉여”를 상징한다.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통제되지 않고 제약이 없는 역동성이다. 아폴로적 구조는 우리에게 언어와도 같은 환상을 제공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지배는 환상의 환상을 창조해낸다. 디오니소스적 지배에 굴복한 사람들은 도취된다(반드시 알코올이나 약물을 복용할 필요는 없다). 니체의 관심사는 통제력을 상실한 개인이 행하는 열정적인 행위로부터 나오는 도취다. 그것은 심지어 격정적인 춤 같은 형태로도 표출된다. 이러한 도취 상태는 정체성의 상실을 낳는데, 그렇게 되면 개별성은 곧 미분화된 삶의 대양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만약 삶이 아폴로적 구조와 디오니소스적 향락 사이에 형성되는 이러한 긴장으로 이끌린다면,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 커리어는 각기 다른 시기마다 한 쪽이 승리를 거두는 줄다리기 경기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다.
--- p.328~329
광기에 대한 근대적이고, 정신의학적인 개념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그것이 《The Wall》의 주인공 핑크(내면의 치료)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연결된다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광인의 관념으로 그려지는 건 회복되어야 하는 윤리적 타락에 빠진 사람이자 광기의 근대적 개념으로 치료를 받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자연적인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다. 비광인이 광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살얼음판을 조심스럽게 건너가야 하는 것처럼, 광인 또한 의학적인 치료를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체크해 보고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광기가 회복 가능하다고 믿는 의사와 간병인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새뮤얼 튜크의 입을 빌려 감호소에 있는 한 광인의 사례를 소개한다. “젊고, 유별나게 강한 광인. 그가 발작을 일으키면 주변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심지어 간수들도 그랬다.” 튜크는 관습적인 지혜를 무시하고 그 환자의 구속 장치를 모두 풀 것을 명령했다. 그랬더니 그는 갑자기 폭력성이 없어지고 친절해졌다.
--- p.371~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