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10/14 이희인(heen@ktcf.co.kr)
한 해 한 번 치르는 고약한 고뿔처럼, 올해도 올해의 좋은 소설을 치렀다.
김채원과 오정희를 함께 읽었다.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해 언젠가 차분히 써내려가던 김채원과, 자그만 거울에 반사된 빛에도 무기력하게 스러져가는 노인을 그렸던 오정희. 일테면 실버픽션이라 할 수 있을지. 두 작가의 시선이, 함께, 인생의 황혼기에 돌려지고 있다는 것이 그닥 뜻밖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늙은 요리사, 늙은 웨이터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어쩐지 아구가 잘 들어맞지 않는 말들을 요설처럼 늘어놓는 초로의 자매 이야기 <인마이 메모리>는 실상 김지원-김채원 작가 자매가 주인공인 듯싶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두워져 가는 방에 홀로 내버려진 채, 틈입자인 강아지에게조차 능멸당하는 노인의 이야기 <얼굴>은 <동경(銅鏡)>이 보여주던 그 어찌할 수 없는 절망과 공포가 재현되고 있다.
르느와르 같다든가, 뭉크 같다든가 서로 그렇게 다른 화풍으로 그린 그림 같은데, 김채원과 오정희의 문체는 여전히 마음을 할퀴는 예리한 손톱을 어디엔가 감추고 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박완서까지, 이제 우리 소설의 어른인 그분들 주름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그 주름 잡힌 눈으로 찬찬하고 세심하게 우리네 살이를 헤집어 낼 것 같다.
윤후명과 윤대녕을 함께 읽었다. 두 분 희대의 방랑객들이 이번엔 또 어디로, 어떤 동기로 훌쩍 떠나갔을까? 낯선 이방에서 또 무엇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을까, 자못 궁금하였다. 그런데, 좀 피곤했던 탓일까? 두 작가 모두 여행을 쉬고 있었다. 그보다는 은둔이랄지 일탈이랄지, 좀 뜻밖이다 싶은 이야기들을 들고 찾아왔다.
병든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찾아든 윤후명의 은둔지나(<외뿔짐승>), 일상에 흐르는 편견과 고독을 피해 동성의 애인 '수사슴 기념물씨'와 골방으로 잦아든 윤대녕의 일탈(<수사습 기념물과 놀다>)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어쩐지 그 은둔과 일탈도 여행의 연장이란 생각이 든다. 몸에 밴 역마살을 주체하지 못해 윤후명은 은둔지에서조차 저 상상 속 동물인 '외뿔짐승(일각수)'과 조우하게 되고, 윤대녕은 백남준의 '수사슴 기념물' 전시회 포스터를 바람 속에 남긴 채 휑하니 프라하로 떠나버리더라. 때때로 두 작가는 너무 넓어지거나 너무 난해해진다.
이동하와 이제하, 박범신을 함께 읽었다. 퍽 다른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실은 그 작가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함께 읽은 것이었다. 단편의 정도(正導)랄지, 작가의 작가됨이랄지, 그런 것들이 두루 느껴지는 함께 읽음이었다. 역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중견 작가들의 세상 보기일진대, 이동하는 그런 나이에 비로소 맞닥뜨리게 되는 신산하고도 당황스런 삶의 경험을(<앙앙불락>), 이제하는 더불어 나이는 먹었으되 여전히 가볍고 유치하기만 한 인간의 관계라든가 삶이라는 것을(<견인>), 박범신은 지금을 반성하는 거울로써의 순수했던 젊은 작가 시절을(<내 기타는 죄가 많아요, 어머니>) 제각기 그리고 있다.
한창훈을 따로 읽었다. 애벌레에 비유되는, 꿈이 거세된 성장과 그 성장을 관통하는 성과 죽음, 역사의 얽힘이 질척대는 문체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한 성장이란 일테면, '젖무덤을 보기 전에 찢겨져 나온 내장을 보았고, 부드러운 살결을 만져보기도 전에 떨어진 붉은 살점을 보았고, 뜨겁게 껴안아보기도 전에 세상을 향해 내뿜어져 나오는 새빨간 피를 보았고, 향기로운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아보기도 전에 두 개골이 부서지는 것을'(p.308-309) 목도하게 된, 너무 빨리 왔거나 너무 버겁게 맞닥뜨린 성장일 터였다. 그러한 애벌레도 허물은 벗겨지고 어떻게든 나비로 날아오르게 될 터이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과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이는 한창훈 글쓰기의 젖줄이 바로 거기에 있었을까?
윤형진을 따로 읽었다. 뭐랄까, 우리 전통에는 퍽 드문 소설이라고나 할까. 책이라는 꽤 상징적인 소재 자체가 이미 그런 것들을 배태하고 있을 터이지만, 지식과 권력, 앎과 함, 읽기와 쓰기 등의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이 비교적 억지스럽지 않게, 짧은 단편에 넉넉히 구축되어 있다. 동시대 사회 문제를 꿰뚫는 시선이 이 만큼 폭넓고 깊은 눈망울로 쓰여진 우화를 우리 문학에서 좀체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75년생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미증유의 데뷔작 <책을 먹는 남자>를 읽는 동안, 보르헤스의 미로 같은 작품들이나 마리 다리외세크의 <암퇘지>, 저지 코진스키의 <챈스 박사> 같은 소설들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뻔뻔하게 비현실적이고, 놀랍도록 상징적인 소설이다.
전경린을 따로 읽었다. 내게 전경린은, 때론 현란한 수사와 형체를 파악하기 힘든 감수성 때문에 조미료를 너무 많이 친 음식을 먹듯 읽어내기 어렵거나, 혹은 거역할 수 없는 통찰력으로 온 몸의 노폐물이 쪽 빠져나가는 얼큰한 보양식을 먹는 시원함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바다에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는 노련한 심리학자가 사랑과 결혼이라는 기묘한 덫에 관해 꽤 정통한 임상 보고를 하듯 그 전개와 통찰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사랑과 결혼, 인생은 알려고 해야 더욱 알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전경린이 내린 임상 결론은 허무한 대로 또 달리 이견이 없을 듯싶다. '어차피 인생에 더 나은 것 따위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단지 더 모르는 것에 끌릴 뿐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없어질수록 삶의 열정도 사라져간다.' 는. (p. 298)
김영하, 배수아, 백민석, 원재길, 전경린, 하성란 등 비교적 신진작가들이 포진하였던 지난해, 올해의 좋은 소설과는 달리, 또 파격적으로 김영하 라는 비교적 신진 작가에게 수상의 영애를 안겨준 동출판사의 '99현대문학상'과는 달리, 중진-원로급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올해의, 올해의 좋은 소설은 마치 소설의 시계를 십여년 전쯤으로 돌려놓은 느낌이다. 무엇일까, 이러한 묶음의 의도는? 새로운 세기를 앞둔 시점에서 소설의 기본이랄지 자세 같은 것을 다시금 환기해보자는, 그래서 그 힘을 노련하고 경험 많은 중진-원로 작가들에게 빌어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유니크한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빛나는 작품들과 함께.